전 세계 의대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해부학 교과서는 '그레이 아나토미(Gray's Anotomy)'다. 1858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크고 무겁기로 악명이 높았다. 이 해부학 고전은 의학적 지식이 더해지며 점점 무거워져만 가다가 2015년 디지털화함으로써 '무게 제로(0)'로 변신했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첫 온라인 버전엔 몸 안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동영상과 전문가 24명의 온라인 강의가 첨부됐다. 의학 교과서의 혁명이라 여겨지는 이 변화를 만들어낸 곳은 140년 된 세계 최대 출판사 엘스비어(Elsevier)다.

세계 최대 출판사 엘스비어의 지영석 회장을 지난 18일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출판과 지식은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진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글로벌 출판사를 이끄는 한국계 미국인 지영석(59) 엘스비어 회장을 지난 1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19~20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 젠더 서밋(유럽연합 주관)' 참석차 한국을 찾은 그는 "지난 25년은 지식과 출판의 디지털화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앞으로 25년, 지식 사회는 인공지능(AI)과 손잡고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할 것이다"라고 했다. 외교관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프린스턴대 경제학과와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출판 업계로 옮겼고, 글로벌 출판사 랜덤하우스 사장을 거쳐 2011년 엘스비어 회장에 올랐다.

저명한 과학저널 셀(Cell)·랜싯(Lancet) 등을 내는 엘스비어는 그간 출간한 책 4만여권과 문서 1700만건을 디지털로 이미 변환했다. 엘스비어 콘텐츠의 다운로드 건수는 연간 약 10억건에 달한다. '신(新)구텐베르크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출판의 디지털화를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디지털 전환을 막 시작했을 뿐"이라고 했다.

"에디터보다 프로그래머가 더 많다"

―출판과 AI라니, 쉽게 연결고리가 안 떠오른다.

"'그레이 아나토미'를 예로 들면, 우리가 단순히 책을 스캔해 올린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 있는 이미지를 3차원으로 변환을 하고 어떤 약물을 투여했을 때 그 약물이 몸에 들어가서 반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시각화를 모두 AI가 했다. 인간이 하기는 불가능하다."

―시각화 외에 AI는 엘스비어에서 어떤 일을 하나.

"우리는 교과서뿐 아니라 각종 저널도 많이 내는데, AI가 과학과 지식 그 자체를 엄청나게 바꾸고 있다. 화학을 예로 들면, 예전엔 과학자들이 화합물을 만들고 이 화합물을 다시 섞어서 또 다른 화합물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실험을 했다. 문제는 화합물이라는 것이 한번 만들면 다시 이를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AI는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진행하고 특정 화합물의 원물질이 무엇이고, 가장 저렴하게 특정 화합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배합도 알려준다. AI 덕분에 지식 자체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하고 있다."

엘스비어의 3차원 해부학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

―출판사 기존 인력으로 이런 일을 수행할 수가 있나.

"기존 인력으론 당연히 안 된다. 우리는 그래서 더 잘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내서 합병하고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 시각화를 위해 '의학을 위한 3D(3D4 Medical)'란 회사를 인수한 식이다. 또 프로그래머 등 개발자들을 정말 많이 영입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출판사이지만 편집자보다 기술자들(tech people)이 더 많다."

―편집자들이 위기를 느낄 수도 있을 듯한데.

"편집자들은 기술자가 자신을 몰아낸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자들을 통해 자신이 하는 일이 더 생기를 띠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편집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작품'(출판물)이 살아남는 것이다. 제본된 종이 책과 달리, 디지털의 옷을 입은 출판물은 살아서 움직이고 AI의 도움을 받으면 출판되고 나서도 온라인 세상에서 계속 진화한다. 종이 책은 무생물이다. 디지털 지식은 생물이다."

"콘텐츠 산업 '농부'에서 '요리사'로"

지 회장은 1년에 300일 이상 출장을 다녀 왔다. 최근엔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출장 횟수가 크게 줄었다. 그는 "출장 빼고는 회사 업무엔 지장이 거의 없다"고 했다. 15년 전부터 원격 근무를 준비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격 근무 시스템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이유가 있나.

"우리는 전 세계에 295개 지사가 있는 회사다. 여러 지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디지털 기술을 업무에 접목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출판 자체의 디지털 혁신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업무 방식은 옛 아날로그에 머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 직원들은 코로나 이전부터 집에서 일할 수 있었다. 원격 근무와 의사 결정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변신에 총력을 다하는 이유가 뭔가.

"디지털 변환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보기 때문이다. 음식에 빗대 말하자면 과거 우리는 농부와 비슷했다. 농사를 짓고 이를 그냥 도매업자에게 넘겼다. 누가 야채를 최종적으로 사가는지 관심이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콘텐츠 디지털화를 통해서 우리는 소비자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수퍼마켓 정도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이제 누가 어떤 콘텐츠를 사가고, 심지어 독자의 눈이 어느 쪽에 몇 분 동안 머무르는지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것을 파악해서 어디에 쓰나.

"재료를 가공하고 양념을 치듯이, 콘텐츠를 근사한 요리 '한 접시'로 만들어 가장 적합한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AI가 이 과정을 돕는 중이다. 각 단계는 같은 재료의 부가가치를 높인다. 농부가 100㎏에 100달러를 받는 야채를 가공해 고급 요리로 만들면 200g에 100달러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이제 첫 단계 정도를 완수했다고 본다. 앞으로 더 흥미로운 일이 지식 세계에서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