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코로나 사태 와중에 월급이 또박또박 통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된다는 긴급재난지원금을 넙죽 받을 염치 또한 어차피 없다. 너무나 많은 주변 사람이 외환 위기 이후 최고의 경제난, 혹은 통계 작성 이후 최고의 생활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을 보탠다면 운 좋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라고나 할까.

일할 수 있는데도 '그냥 쉬는 인구'는 지난 3월의 경우 237만여 명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통계상 취업자이지만 실제로 일은 하지 않은 '일시 휴직자'도 160만명 이상으로 폭증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30% 넘게 증가한 수치다. '20대 백수' 역시 41만여 명으로 작년 대비 10만명이나 늘었다. 소상공인 가운데 4분의 1이 지금 이대로라면 폐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며, 550만 자영업자 대부분이 불황에 힘들어한다. 대기업 또한 위기의 무풍지대는 결코 아니다.

미증유의 팬데믹 상황에서 물론 우리만 겪는 고통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시장통 상인이 대통령 면전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작금의 '거지 같은' 경제는 코로나 사태 훨씬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문재인 정부의 '원죄(原罪)'는 가볍지 않다. 소득 주도 성장, 주 52시간제, 최저임금제, 탈원전 등의 졸속 추진에 따라 한국 경제는 이미 기초 체력이 약해지거나 기저 질환을 앓던 중이었다. 현 정부 집권 이래 실업자는 줄곧 증가하고 실질임금은 계속 감소하였다. 전체 가구 가운데 절반이 각종 현금 복지 지원을 받게 된 이면에서 근로자의 가계 부채는 큰 폭의 증가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급 공무원 증원과 질 낮은 공공 부문 일자리 창출이 고용 절벽의 실상을 끝까지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런 현실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4·15 총선 결과와 관련이 있을 듯싶다. 대다수 국민이 생계와 취업을 당장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경제를 파탄시켰음에도 좌파 정권이 불패 신화를 거듭하는 남미식(南美式) 경로는 최악의 상상이라 일단 논외로 치자. 하지만 지금 우리의 경우에도 경제적 불안감이 유권자의 정치적 판단력을 자못 흐리고 둔하게 만드는 측면은 뚜렷해 보인다. 행여 이는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무섭고 은밀한 통치술일지 모른다.

일찍이 프랑스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가난하면 적(敵)을 선택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 때마침 유례없는 코로나 역병까지 가세하자 표심은 심하게 흔들렸다. 충격적인 권력 비리와 잇따른 경제 실정(失政)의 책임을 따지는 주권자가 아니라 '나라님 성은(聖恩)'에 감읍하는 백성의 마음이 되고 만 것일까. 심판의 대상은 오히려 야당이었다. 복지 포퓰리즘이 일상화·만성화되면서 어쩌면 한국인의 '마음의 습속'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산업화 시대의 우리도 아니고, '반듯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민주화 시대의 우리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의식구조는 1950년대 말 미국의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가 언급한 '빈곤 문화(culture of poverty)'를 점차 닮아가고 있다. 내 탓보다는 남 탓, '가난이 벼슬'이라는 생각, 부자에 대한 적대감, 자립정신보다는 의타주의(依他主義), 자존감 및 주체 의식의 부재, 요행 심리와 공짜 심보, 경쟁 기피, 피해의식, 미래지향적 사고의 결여, 밥그릇 싸움, 편 가르기 등 빈곤 문화의 전형적 레퍼토리가 한국 사회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심의 향배는 집권 세력의 입장에서 크게 해롭거나 불리할 게 없다.

언제부턴가 배급과 할당, 그리고 공유(公有)를 중시하는 국가 주도 반(反)실물 이념 경제가 득세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노동의 신성함과 일자리의 엄중함이 무너지고 있다. 개인의 피땀, 민간의 창의, 시장의 활력 또한 갈 곳을 잃은 상태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총선 승리를 등에 업고 기왕의 국가주의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을 태세다. 이른바 ‘코로나 뉴딜’ 정책이다. 국가주의가 빈곤 문화를 잉태하고 빈곤 문화가 국가주의로 환류하는 악순환 고리는 결국 쓰러질 때까지 굴러갈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브레이크도 달리 없다. 싫든 좋든 국민이 이 길을 택했다면, 좋든 나쁘든 결과 또한 국민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