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파리 7구의 고급 백화점 봉마르셰.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인 관광객이 줄어들어 썰렁한 가운데 1층 스위스산 럭셔리 시계 코너가 특히 한산했다. 손님이 없는 매장 직원들은 우두커니 서 있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백화점 관계자는 "일부 초고가 시계가 꾸준히 팔려나가 실적이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판매량으로 보면 걱정스럽다"고 했다.
400년 역사를 가진 스위스 시계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스마트워치가 기계식 시계를 밀어내는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외부 요인으로도 강펀치를 맞고 있다. 지난해 최대 수출 시장인 홍콩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로 매출이 큰 폭으로 떨어졌고,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소비 빙하기를 만나 판매 감소 폭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수출 한 해 300만개 넘게 감소
스위스시계산업연맹(FH)에 따르면, 지난해 스위스 시계 업체들은 2063만개의 시계를 수출해 전년도 대비 수출량이 13.1% 감소했다. 해외에서 약 311만개가 덜 팔린 것으로서 1984년 이후 35년 만에 가장 적은 수출량이다. 수출액은 초고가 시계 판매가 선방한 덕분에 216억8060만스위스프랑(약 27조8700억원)으로 2018년보다는 2.4%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지난해 수출액 역시 5년 전인 2014년보다 2.6% 적은 것이다. 지난해 스위스의 모든 손목시계 출하량은 2100만개로서 애플워치 출하량(3070만대)의 3분의 2에 그쳤다.
오메가·브레게·론진·티소 등 약 20개 브랜드를 거느린 세계 최대 시계 제조 업체 스와치그룹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11% 감소한 10억2000만스위스프랑(약 1조1300억원)이라고 밝혔다. 이런 실적을 발표한 1월 30일 스와치그룹 주가는 4.3% 급락했다. 애널리스트들의 평균 예상치보다 7% 낮았기 때문이다.
스위스 시계를 둘러싼 저조한 지표가 쏟아지자 1969년 전자식 쿼츠 시계 등장에 따른 충격으로 스위스 시계 산업이 약 15년간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시절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969년 일본 세이코는 수정 진동자에 전기를 흘려 작동시키는 '쿼츠(Quartz)' 시계를 선보여 정확하고 저렴한 시계를 출시했다. 이에 따른 여파로 기계식 장치에 의존하는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80년대 중반까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치품으로서 위상을 되찾으면서 스위스 시계는 다시 활로를 찾았지만 근년에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시계 산업이 주춤하면서 스위스 경제도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다. 스위스 시계업계는 생산량의 95% 이상을 수출한다. 제약, 기계류에 이어 제3의 수출 품목이다. 시계 산업이 타격을 입으면 기계류 생산량도 감소하는 악순환을 부르는 게 스위스 경제의 일반적 패턴이다. 스위스에서 시계 산업 종사자는 5만9000명에 이른다.
◇코로나 팬데믹, 스위스 시계에 직격탄
지난해 스위스 시계 산업에 타격을 가한 주된 원인은 '차이나 리스크'였다. 6개월간 이어진 홍콩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목을 잡았다.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홍콩은 스위스산 시계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장이다. 부가가치세가 낮아 수익률도 높은 효자 시장이었다. 하지만 FH는 작년 홍콩에 대한 수출액이 2018년보다 11% 급감한 것으로 집계했다.
홍콩 시위가 잠잠해지기가 무섭게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이라는 악재를 만난 올해도 반등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RBC(캐나다왕립은행)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계 시계 산업의 매출이 최소 8%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작년에 스위스 시계 업체들은 홍콩 수출이 대폭 줄었지만 중국 본토에서 선전해 충격을 줄였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중국 시장마저 얼어붙고 있다. 중국 고객이 스위스 시계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출의 40%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닉 하이에크 스와치그룹 최고경영자는 올해 초 기자회견에서 "올해도 홍콩 시장에서 10%가 넘는 매출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불경기의 영향으로 롤렉스, 파텍 필립 등 럭셔리 시계도 중고품 거래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애플, 삼성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출시하는 스마트워치가 급성장하며 스위스 시계의 아성을 흔들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NPD에 따르면, 미국에서 2018년 스마트워치는 전년도와 비교해 판매량이 61%, 매출은 51% 급성장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심박수, 걸음 숫자에 시계 기능까지 갖고 있는 피트니스밴드 시장이 확대되는 것도 기계식 시계 판매에는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스마트워치와 피트니스밴드 붐에 따라 스위스 시계 중에서도 3000스위스프랑(약 385만원) 이하 중저가 제품들의 판매가 특히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사치재로 생존할 가능성은 높아
그러나 쿼츠 파동을 극복했듯 스위스 시계 업체들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시간을 보는 장치로서는 역할이 줄어들 수 있지만 사치품으로서 스위스산 시계가 갖는 매력이 쉽게 꺾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잇따른 악재에도 3000스위스프랑 이상 고가 시계 판매량은 중저가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해 스위스 시계 수출은 수량으로는 2000년과 비교해 30% 감소했다. 하지만 수출액으로는 같은 기간 110% 늘어났다. FH의 통계를 분석해 보면 해외에 파는 스위스 시계 가격이 2000년에는 평균 347스위스프랑(약 45만원)이었지만 2019년에는 1050스위스프랑(약 135만원)으로 크게 뛰었다. 이 같은 흐름은 스위스 시계가 사치재로서 여전히 건재하며 미래에도 경쟁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뒷받침한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애널리스트 데보라 아이켄은 "스위스 시계 업체들이 명맥을 유지하려면 고가 명품 시계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WHO 등 국제기구 22곳, 제네바의 시간도 멈췄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스위스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스위스는 14일까지 감염자 1375명, 사망자 13명으로 집계됐다. 인구 860만명의 소국(小國)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바이러스 확산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특히 스위스의 관문인 제네바가 바이러스로 인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제네바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방어하는 컨트롤타워인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해 국제기구가 22개 몰려 있는 도시다. 국제회의 참석차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여는 지갑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난 10일 세계무역기구(WTO) 직원 중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국제기구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스위스 정부가 1000명 이상 모이는 행사를 금지했고, 제네바시는 100명 이상의 모임을 열지 못하게 했다. 사실상 국제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미 확진자가 나온 WTO를 비롯해 상당수 국제기구가 회의를 취소하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 국제노동기구(ILO),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등 각종 기구가 이사회나 회의를 속속 연기하고 있다.
각종 박람회도 속속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지난 5일부터 열흘간 열릴 예정이던 제네바 국제 모터쇼가 개막 엿새를 앞두고 취소됐다. 세계 최대 규모의 명품 시계·보석 박람회인 '바젤월드'도 올해는 열리지 않는다. 매년 3월 전후로 열리곤 했는데 주최 측은 올해는 건너뛰고 내년 1월에 열기로 했다. 4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또 다른 고급 시계 박람회인 '워치스&원더스 제네바(WWG)'도 취소됐다. WWG는 매년 1월 제네바에서 열리던 스위스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가 올해부터 시기를 4월로 옮기면서 명칭도 바꾸기로 한 것이다. 한정 수량으로 생산하는 개당 수억원대 초고가 시계는 시계 박람회에서 '큰손'들이 직접 차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올해는 럭셔리 시계 업체들이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