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명 플로리스트 토니 마크루(Marklew)는 꽃을 볼 때 꽃잎부터 만져본다. "꽃은 천연염료를 먹인 의류 원단 같아요. 옅은 색부터 진한 색까지 꽃잎 한 장에 그러데이션(점진적으로 농담이 번져가는 것)이 돼 있고, 꽃봉오리에서 만개할 때까지 빛에 따라 채도도 달라지죠. 벨벳처럼 부드럽기도 하고, 종잇장처럼 서걱서걱하기도 합니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마법의 디자인 도구이지요."
샹그릴라 파리 호텔 등 대형 호텔은 물론 해외 패션 브랜드 디올, 구찌, 지방시, 랄프앤루소 등 각종 쇼 무대 장식을 전담하다시피 한 마크루는 밑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대형 꽃기둥을 만들거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듯 꽃 커튼을 드리워, 말마따나 '꽃길만 걷게 하는' 콘셉트로 이름이 났다. 패션을 전공했지만 전통 꽃꽂이는 배우지 않았다는 그는 스스로를 플로리스트 대신 '이벤트 이매지니어(imagineer·창안자)'로 부른다. '상상하다(imagine)'와 '엔지니어(engineer)'의 합성어로 월트 디즈니가 직원들에게 붙인 직책에서 따왔다.
최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과 협업해 웨딩 무대를 새롭게 꾸민 마크루는 "같은 검은색이라도 원단 재질과 재단에 따라 달라 보이듯 언뜻 비슷해 보이는 꽃도 약간의 질감 차이로 색다르게 연출할 수 있다"고 했다. 작약, 모란, 수국같이 커다란 꽃송이로 부피감을 강조하고, 300장 넘는 꽃잎이 하늘하늘하게 겹쳐진 라눙쿨루스나 '영원한 사랑'이란 꽃말의 리시안셔스같이 장미와 엇비슷해 보이는 꽃을 촘촘히 엮어 강렬함과 은은함을 오간다. 그는 "소규모 결혼식이 유행하고 홈파티가 많아지면서 풍성한 꽃 디자인을 찾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다른 비용을 최소화하더라도 소셜미디어에 '인증'하기 위한 '사진발'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얘기. "인터넷에서 사진을 가져와 '이것과 똑같이 해주세요'라고 할 때 가장 난감해요. 디자이너에게 대놓고 베껴달라는 꼴이니…(웃음)."
조선호텔 웨딩무대에서 그는 디자이너 발렌티노의 드레스에서 영감받은 꽃 디자인을 선보였다. 연한 복숭앗빛과 연분홍 계열의 아발란쉐 장미를 주로 쓰고, 큰꽃으아리(라일락 클레마티스)를 포인트로 다소 바랜 듯 낭만적인 파스텔 색조로 식탁을 휘감았다. "꽃병엔 진주 장식같이 볼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를 더하면 꽃이 부족해도 식탁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어요. 말린 꽃을 생화에 섞으면 값도 싸고 오래 보관할 수 있지요."
마크루가 한국에서 찾은 '보물'은 가로수를 장식한 노란색 은행잎이다. 황금이 쏟아지는 듯한 색감에 탄력 있으면서도 말린 이파리 같은 촉감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한옥 창호 디자인의 직선미, 지붕과 기둥의 곡선미는 황금 비율을 연상시킬 만큼 대단한 균형감을 지니고 있지요.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의 풍요로움까지 곁들여 한국적인 '꽃길'을 완성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