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마지막 날, 특별한 영화 한 편을 보지 않으면 안 될 듯한 기분이다. 1946년 개봉한 프랭크 캐프라의 ‘멋진 인생’을 골랐다. 하느님이 날개 없는 천사 클레런스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조지 베일리라는 사람을 도우라고 한다. 천사와 인간이 처음 만난 곳은 다리 위, 조지가 강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기 직전이다. 미국인이 연말에 가장 즐겨 보는 영화 1위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동지(冬至)가 중요해?"라고 베이징에 사는 중국인 친구로부터 아이(i) 메시지가 왔다. 중국에서도 동지를 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이 동지라는 것과 함께. 팥죽을 먹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팥죽이지만 동지이니 한 그릇은 비워야 한다는 잔소리가 있었고, 그래서 동지가 언제라는 것을 알고 지냈다. 중국은 한국과 다른지 동지가 꽤 큰 명절인 듯했다. '소년(小年)'이라고 하기도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을 치른다고 했다. 동지는 대개 크리스마스쯤이니 꽤나 미리 새해를 준비하는 셈이다. 중국인들이 동지에 서로 축복하는 시구(詩句)를 나눈다는 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중국인이라면 어떤 시구를 준비했을까 생각했다. 또 어떤 시구에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그동안 어떻게 새해를 맞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주로 버렸다. 책상과 책꽂이 정리를 했고,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을 버렸고, 냉동고에서 화석화된 생선과 곶감을 버렸다. 2019년에도 그랬다. 송년 의식과 신년 의식이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12월에 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12월 마지막 날의 나는 무언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는, 아직 하지 않은 게 있다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영화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 내겐 그런 영화가 필요했다. 수십 년 동안 '연말의 영화' 같은 걸 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해온 사람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날은, 한 편의 특별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DVD장과 고심해서 모아놓은 외장하드의 파일들과 넷플릭스의 영화들을 살펴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명랑하고 따뜻하기 그지없는 옛날 영화를 보고 싶었다. 복잡하지 않지만 단순하지는 않은 영화를 보고 싶었다. 송년의 애잔함과 신년의 기운을 모두 받을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앞뒤로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옷처럼 말이다.

1946년에 개봉한 프랭크 캐프라의 '멋진 인생'을 골랐다. 원제는 'It's a Wonderful Life'. 제목도 그렇고, 영화 스틸 컷도 그렇고 우울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프랭크 캐프라와 '멋진 인생'은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예전부터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영화 중 하나였다. 도입부부터 경쾌했다. 하느님이 천사를 부르자 별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중심으로 다가온다. '반짝반짝 작은 별' 멜로디가 깔리면서. 빛나는 중심이 하느님이고, 작은 별이 천사다. 천사긴 한데 날개 없는 천사. 지능은 토끼만도 못하지만 마음만은 순수한 2등급 천사 클레런스. 하느님은 클레런스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조지 베일리라는 사람을 도우라고 한다. 무사히 돕는다면 클레런스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며.

조지 베일리와 클레런스가 처음 만난 곳은 다리 위. 왜냐하면, 조지 베일리는 강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으니까. 조지는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동업자인 삼촌이 8000달러를 잃어버려 회사가 위기에 처했고, 둘 중 하나는 감옥에 가야 하며, 지금까지 힘써 일궈온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아내 메리와 네 아이에게 신경질을 부렸고, 아이의 담임에게 전화로 폭언했고, 술집에서는 몸싸움해서 입술이 찢어지고, 운전하다 몇백 년 된 나무를 들이받았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들이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그날은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런 조지 베일리가 다리 위에 섰다. 조지 대신 클레런스가 뛰어든다. 그러면 조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느님에 따르면 토끼만도 못한 지능이라는 클레런스의 계산대로 조지가 클레런스를 구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조지가 말하자 조지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된다. 천사인 클레런스가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몸은 그대로이고, 사람들도 조지를 볼 수 있지만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또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조지가 알던 사람들은 조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웃이나 친구, 어머니 모두 조지를 낯선 사람으로 대한다. 또 그가 알던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조지가 태어나지 않은 것이 되었으므로, 그가 목숨을 구했거나 위험을 모면하게 해준 사람들이 그대로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조지는 썰매를 타다 웅덩이에 빠진 동생을 구하다 독감에 걸려 한쪽 귀가 멀었고, 실의에 빠진 약사 가우어가 실수로 독약을 처방한 것을 바로잡았었다. 조지 베일리는 선량하고, 명랑하고, 이타심이 많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으로 자랐고 존재만으로 베드퍼드 폴즈에 생기를 돌게 하는 존재였다. 베드퍼드 폴즈에 사는 사람 중 조지 베일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조지 베일리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자 사람들이 모두 조지를 위해 기도한다. 친구, 이웃, 술집 주인, 약사 가우어, 어머니, 동생 모두가 조지 베일리를 위해 기도하자 그 기도가 하느님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연말에 가장 즐겨보는 영화 1위가 '멋진 인생'이라는. 1위일 줄 알았던 '나 홀로 집에'는 3위였다. 300만달러를 들여서 베벌리힐스에 세트장을 지어 찍었던 대작 '멋진 인생'은 개봉했을 때 관객들로부터 외면받았다. 묻히는 줄 알았던 이 영화는 영화사의 실수로 극적으로 부활한다. 저작권 연장 신청을 하지 않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퍼블릭 도메인이 되었고, 연말 시즌에 방송사들은 '멋진 인생'을 틀기 시작한다. '멋진 인생'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 결과, 2020년인 현재까지도 찬란하게 살아남았다. 1946년 12월에 생명이 다한 줄 알았던 영화가 말이다.

조지의 인생 같다. 조지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소원을 물리고, 다시 조지 베일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최악의 하루인 줄 알았던 하루는 최고의 하루가 된다. 되살아난 조지가 맞는 크리스마스와 그 이후의 삶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조지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이 조지의 집으로 몰려와 특별한 선물을 준다. (어떤 선물인지 말하고 싶지만 여기까지…) 날개를 얻은 클레런스까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우연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조지가 힘써 일군 운이어서, 그렇게 얻은 해피엔딩이어서 그랬다. 운이나 복은 스스로 힘껏 애써서 얻는 거라는 미국적인 교훈에 감화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조지의 수호천사라고 주장하는 클레런스 말고도 조지의 사람들 모두가 조지의 수호천사라고 느껴져서 그랬다. 조지가 클레런스의 수호천사라고도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