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7~8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열리는 항공협정 회담을 앞두고 국내 항공업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UAE 요구대로 우리나라와 UAE 간 항공편 증편이 이뤄지면 유럽으로 가는 국내 여행객 수요가 UAE 항공사 쪽으로 급격히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석유 자본을 등에 업은 UAE 항공사들은 원가 이하 가격에 비행기표를 내놓는 방식으로 국내 여행객을 빠르게 흡수해가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항공 협정은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UAE 요구대로 증편할 경우 중동 항공사만 득을 본다"면서 "지금보다 하늘길을 더 열어주면 국내 항공사는 유럽 노선 폐쇄까지 고려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항공사 대비 20~30% 저렴
이번 회담에서 UAE는 인천~UAE 노선 주 7회 증편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에미레이트항공이 인천~두바이 노선을, 에티하드항공이 인천~아부다비 노선을 주 7회 운항하는데 각각 주 14회로 늘려달라는 것이다. UAE는 지난해 6월 열린 항공 회담에서도 같은 요구를 해왔지만, 양국간 입장 차이로 결렬됐다.
UAE가 집요하게 증편을 요구하는 이유는 유럽으로 가는 여행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라고 업계는 분석한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에미레이트항공 이용객 중 72%, 에티하드항공 이용객 중 63%가 UAE를 거쳐 유럽이나 아프리카로 가는 승객이었다. 탑승률도 높다.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에미레이트항공은 84%, 에티하드항공은 82% 탑승률을 기록했다. 국내에서는 대한항공만 주 7회 인천~두바이 노선을 운항하는데 탑승률은 71%에 그쳤다.
승객들은 대한항공 대비 20~30% 정도 저렴한 중동 항공사를 선호한다. 예를 들어 9월 24~30일 인천~두바이~파리를 다녀오는 왕복 비행기를 에미레이트항공으로 이용하면 일반석 기준 최저 90만7700원이지만, 같은 조건으로 대한항공 직항을 이용하면 최저 122만5400원이다.
항공기 체급도 다르다. 에미레이트항공과 에티하드항공은 480석이 넘는 최신 A380을 투입하고 있지만 대한항공은 두바이 노선에 218석 규모 A330을 운항하고 있다.
국내 항공사 관계자는 "유럽행 승객은 중동을 경유하더라도 가격이 30만원 이상 저렴하면서도 항공기가 더 좋기 때문에 중동 항공사로 몰릴 수밖에 없다"면서 "최근엔 두바이·아부다비에서 1~2일 머물며 관광한 뒤 유럽으로 가는 여행 상품도 나와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전 세계 시장 교란하는 중동 항공사
이처럼 파격적인 가격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배경엔 UAE 정부가 주는 불법 보조금이 있다고 업계는 주장한다. 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아메리칸항공·델타항공·유나이티드항공 최고경영자(CEO)들은 미국 일간 USA투데이에 공동 기고문을 내고, "지난 10년간 UAE와 카타르의 항공사가 정부로부터 500억달러(58조9500억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아 공정하지 못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조금 덕분에 에미레이트항공은 단기간 몸집을 불려 현재 국제 여객과 화물 수송 1위 업체로 올라섰다. 이 과정에서 호주 콴타스항공은 유럽행 승객들을 중동 경유편으로 쓸어가는 중동 항공사들에 밀려 런던행을 제외한 유럽 직항 노선을 차례로 없앴다. EU(유럽연합)에서도 루프트한자·에어프랑스 등이 몇몇 중동·아시아 노선을 없애면서 2000년 이후 항공산업 일자리 8만 개가 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항공업계는 외국보다 우리나라가 받는 피해가 더 크다고 말한다. 한 항공사 국제 업무 담당 임원은 "미국·중국은 국내선 매출 비중이 70%에 달하지만 우리는 5%에 불과해 국제선에서 승객이 줄면 만회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항공업계는 노선이 한 개 사라질 경우 일자리 1500개가 감소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만약 우리나라 국적 항공사들이 유럽 노선을 없애면 UAE 항공사들이 멋대로 가격을 올려 우리 승객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
협상 주체인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항공업계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고, 양국 항공 산업의 균형 발전이라는 기본 원칙에 따라 협상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는 "항공 노선은 한번 내주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면서 "청와대나 외교부가 건설·원전 등 다른 산업 분야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증편 요구를 받아줄까봐 우려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