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품 감정(鑑定)이 10년 이상 퇴보할 위기다."

한국화랑협회는 최근 '미술품 감정 데이터베이스 폐기 금지 요청'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발단은 지난 3월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의 해산이다. 2003년 설립돼 이중섭·박수근·천경자 등 세간을 흔든 진위(眞僞) 판정을 비롯, 16년간 국내 미술품 감정을 사실상 주도해 온 이 단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그간의 '감정 자료' 처리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1981년 국내 최초로 감정을 시작했으나 2007년부터 평가원과 업무 제휴를 맺고 일임해 온 화랑협회는 평가원 측에 "감정 업무 재개를 위해 감정 자료를 공유해 달라" 요청했으나 정보 유출 등의 이유로 거절(폐기 방침)당하자 지난 4일 법원에 자료 권리에 대한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상태다. 평가원 대표를 지낸 엄중구 샘터화랑 사장은 "평가원 청산인에 대한 자격 정지 소송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감정 자료 폐기? 거센 후폭풍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 발급한 감정서. 최쌍중 '풍경'을 진품으로 감정했다. 이 단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향후 이 감정서의 효력 여부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술품 감정 자료는 감정 의뢰작의 특징 및 사진, 감정위원회 소견 등이 망라된 파일이다. 지난 3월 평가원 해산 의결 주주총회에서도 이 자료 처리를 두고 고성이 오갔고 "오픈 소스로 공개하자" "주주가 나눠 갖자" "판매하자"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이후 "폐기하겠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최웅철 화랑협회장은 "폐기될 경우 지금껏 발급된 감정서 효력은 물론 훗날 진위 시비가 다시 불거질 위험이 크다"고 했고, 윤용철 부회장은 "평가원 일부 인사가 자료를 선점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반면 평가원 청산인 임명석 우림화랑 사장은 "폐기 주장은 감정이 격해져 나온 얘기일 뿐"이라고 했다. 현재 9000건으로 추산되는 감정 자료는 외부 접촉이 차단된 채 평가원 사무실에 봉인돼 있다.

감정 경쟁… 감정 싸움 되나

새로 설립된 감정 단체도 논란을 낳았다. 평가원 해산 직후 출범한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이하 센터)의 감정위원 절반 이상이 기존 평가원 인사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화랑협회 측은 "당초 해산 이유로 공공성 강화를 위한 사단법인(한국미술품감정협회)으로의 일원화를 내세워놓고는 새 주식회사를 만들어나간 것은 의도가 불순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센터 측 정준모 공동 대표는 "세대교체가 자리 잡힐 때까지 일부가 도와주는 것일 뿐 평가원과 연결 짓지 말라"고 했다. 두 단체는 지난주 경쟁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민속품·도자기로도 영역을 넓히겠다"(센터) "감정서에 블록체인 방식을 도입하겠다"(화랑협회) 등의 구상을 내세우며 기 싸움을 벌였다.

외국은 주로 작가 재단이 진위 감정을 담당하지만, 국내의 경우 화랑가 및 사설 단체가 맡고 있어 진위 판정이 갈리거나 공신력 부족 등이 지적돼 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추후 공공성 강화 차원에서 감정 단체 중 한 곳을 '미술품감정연구센터'로 지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최근 생긴 센터가 정부 계획인 '미술품감정연구센터'와 명칭이 비슷해 일부 협회·단체로부터 항의 민원이 접수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