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업 처지에서 우수한 인재를 갖고 있다는 건 자랑거리다. 그러나 소재·부품 등을 개발·생산하는 LG이노텍은 지난해 힘들게 스카우트한 박사급 인재 A(28)씨가 외신에 이어 국내 언론에서도 주목받자 비상이 걸렸다. 국내 포항공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A씨의 전공은 신소재 공학. 국내 주요 기업들이 미래 산업으로 많은 투자를 하는 분야라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A씨가 박사 학위를 딴 의료 소재 쪽 박사 학위 전공자는 많지도 않다. 이미 스카우트를 할 때도 삼성전자종합기술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SK하이닉스, LG전자 등 11곳과 경쟁해 데려왔다. LG이노텍 관계자는 “과거에도 화제가 된 박사급 인재를 경쟁사에서 연봉 5배와 집을 주고 데려간 적이 있다”며 “어디로 이직했는지도 몰랐는데 위약금을 옮긴 경쟁사에서 입금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2. 현재 전기차용 배터리 기술 유출 의혹과 관련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와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서 소송 중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2017년부터 약 2년간 LG화학에서 SK이노베이션으로 연구·개발(R&D) 인력 등 총 76명의 대거 이직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LG화학은 “인력을 데려가며 핵심 기술도 함께 유출됐다”고 주장하고 있고, SK이노베이션은 “정당한 인력 스카우트”라고 반박한다. 배터리 사업은 친환경 바람과 함께 ‘포스트 반도체’라 부르며 기업들이 투자를 가속하는 분야. 국내 업계 1위는 LG화학, 3위는 SK이노베이션, 2위가 삼성SDI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배터리 사업이 연평균 25%씩 성장하는데 전공자는 부족하다 보니 인력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하다”며 “배터리 업계뿐 아니라 현대자동차나 수입차 등 자동차 업계, 중국 기업뿐 아니라 스웨덴 노스볼트 등 유럽 기업까지 국내 인재 쟁탈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공계 박사 인재 쟁탈전
기업 간 이공계 박사 인재 채용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과거 국내 기업들은 반도체·석유화학·자동차 등 각자 주력 분야가 선명했다. 그러나 갈수록 그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원하는 인재 역시 겹치고 있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미국·중국·유럽 등 해외 기업들도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기 때문에 핵심 인력의 몸값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최근 가장 몸값이 높은 분야는 신소재와 인공지능(AI)이다. 신소재는 배터리와 화장품 기업 등에서, AI는 전자 부문을 가진 국내 대기업뿐 아니라 네이버 등 IT 기업, 자율주행 기술이 필요한 자동차 업계도 경쟁사다. 여기에 미국 페이스북이나 아마존 등도 영입 경쟁에 뛰어든다. LG그룹 관계자는 “스마트폰 기술은 현재 끝까지 왔다고 보기 때문에 신소재 전공 인력들을 데려가기 위한 눈치싸움이 심하다”고 말했다. SK그룹 관계자도 “반도체와 AI 쪽 박사 인재는 서로 데려가려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했다.
카이스트 수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UC버클리에서 AI 관련 박사 학위를 받은 B(32)씨는 졸업할 때 삼성전자·신한금융 등 국내 대기업, 페이스북·아마존 등 외국 기업 등 총 일곱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그는 “여러 조건을 검토한 결과 페이스북이 기본급 외 보너스 주식, 수요일 재택 근무와 자율 출퇴근 등 직원 복지가 좋아 선택했다”며 “외국 기업에서 근무하면 해외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도 매력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에서 AI 관련 박사를 하는 김모(24)씨는 “설카포(서울대·카이스트·포항공대)에서 AI 박사 했다 하면 네이버랩스, 카카오브레인에서 초봉 1억 이상 부른다”고 말했다. 현재 병역 특례로 국내 대학 AI 연구소에서 근무 중인 김모(28)씨도 “아직 군 복무 기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헤드헌터들에게 연락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
전보다 인기가 주춤하긴 하지만 현재 대기업들의 캐시 카우(수익 창출원)인 반도체·스마트폰 등과 관련 있는 전산·전자공학 전공자도 꾸준히 수요가 높다. 카이스트에서 전산학 박사 학위를 따고 지난해부터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는 C(31)씨는 “네이버와 SK텔레콤 등이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편”이라며 “공채보단 상시 채용 형태로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100% 국내파보다 해외 경험이 있는 인재를 선호하는 경향이 당연히 더 높다. 선진 기술을 이미 체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텍사스 A&M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삼성전자에 재직 중인 D(41)씨는 “졸업할 때쯤 국내 대기업뿐 아니라 미국 퀄컴 등에서도 입사 제의가 들어왔다”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국내 기업은 간략한 면접만으로도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전공에 따라 천차만별
이공계 박사들에게 대기업 연구원은 예전만큼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닌 것도 스카우트 전쟁을 과열시키는 요인이다. 과거 이공계 박사들은 정부 기관 연구원 등을 거쳐 교수로 가거나, 대기업 연구소를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외적으로 “취직 잘했다”는 말을 들으려면 삼성,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려면 LG, 높은 연봉을 받고 싶으면 SK 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그러나 최근엔 대기업 대신 중소기업을 택하거나, 스타트업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중국 기업들이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해 데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내 기업도 연구소는 대부분 지방에 있기 때문에 지방 갈 바엔 중국 간다는 생각으로 중국 기업 스카우트 제안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배터리 분야 중견 기업인 코캄의 경력직 채용에 LG화학 연구소 직원들이 지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AI 분야 스타트업 관계자는 “내부 연구소 인력은 대부분 대기업 연구소 출신 중 스카우트한 사람들”이라며 “스타트업 형편상 높은 연봉을 주지는 못하고 지분과 미래 성장 가능성 등을 어필해 데려온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 대표이사(CEO)가 직접 해외까지 나가 박사급 인재를 데려오기도 한다. LG화학은 그동안 미국·중국·일본에서만 진행하던 CEO 주관 인재 채용 행사를 올해는 처음으로 유럽(독일)에서 진행했다. 삼성전자는 임원들이 수시로 해외를 돌며 박사급 인재를 스카우트한다.
그러나 모든 이공계 박사가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다. 이공계 인력들이 박사 학위를 딸 때쯤 기업이 원하는 분야와 수요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석·박사를 가장 짧게 한다고 해도 5년이 걸리고, 국내 기업들의 주력 분야는 빠르게 달라지기 때문에 미리 내다보고 학위를 따는 건 힘들다. 그야말로 타이밍과 운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기업들에 인기 있었던 전공은 1970~80년대에는 원자력, 1990~2000년대는 화학공학과 전기전자공학, 2000년대 후반부터는 바이오·신소재·AI다.
포항공대에서 생명공학 박사를 따고 화장품 회사에서 근무 중인 김모(36)씨는 “보통 박사 학위를 막 딴 상태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 경우는 산학 협력을 통해 기업과 일했던 경우거나 그 시기에 기업이 많이 채용하는 분야”라며 “생명 쪽은 바이오붐 때문에 인력 수요만큼 석·박사 공급도 많아 초봉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카이스트에서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모(26)씨도 “현재 전자공학 쪽은 인력이 남아도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대학에서 건설·환경공학 박사과정 중인 조모(27)씨도 “우리는 (기업에서) 귀한 대접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요즘 젊은 박사 인재들은 연봉뿐 아니라 미래 가능성, 복지 등을 종합적으로 보고 회사를 선택하기 때문에 채용하기 위해 더욱 다양한 부문을 고려해야 한다”며 “연봉은 중국 기업보다 많이 주기 어렵고, 복지 부문에서는 미국이나 국내 스타트업 기업보다 잘 해줘야 하기 때문에 갈수록 인재 눈치작전이 치열해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