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에는 무덤도 많은데/깊고 깊은 곳에 박 첨지 장사 지냈네/말에서 내려 한참을 흐느껴 우니/나무꾼이 이상하게 쳐다보네[靑山黃土多/深深葬僉知/下馬久嗟泣/樵人怪見之].'

오언절구 형식의 이 한시에 등장하는 '박 첨지'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다. 서얼 출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북학의(北學議)' 같은 저서를 남긴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경기도 광주의 무덤가에서 눈물 흘리며 추모시를 썼던 시인이 석견루(石見樓) 이복현(李復鉉·1767~ 1853)이다. 조선 후기 시단의 황금기에 활동했던 석견루의 시와 산문 360여 편을 담은 '석견루시초(石見樓詩鈔·성균관대출판부·사진)'가 최근 완역 출간됐다. 번역은 조창록 성균관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과 이성민·김채식·이상아 대동문화연구원 연구원이 나눠 맡았다.

석견루라는 호는 꿈속에서 벼루[硯]를 본 뒤 '석견(石見)'으로 한자를 파자(破字)해서 지은 것이다. 시인다운 작명처럼 석견루는 60세를 맞아서 쓴 자전(自傳)에서도 시에 대한 애정을 스스럼없이 고백했다. '나이도 예순이 다 되어가는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지만 끊은 지 33년이요, 시를 읊조리기 좋아해서 그만두지 못한 것이 43년이다. 시를 읊조리기 좋아해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고질병'이라는 것이다.

특히 추사 김정희와 박제가 등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많은 문인과 두터운 교분을 나눴다.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 연출가인 이해랑(李海浪·1916~1989) 선생이 석견루의 직계 후손이다.

해제를 맡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석견루는 조선 후기 시단의 황금기에 중요한 시인들과 오랫동안 교유했기에 당시 시단의 동향을 알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