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내에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37개에 이른다. 저마다 역사와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떨친 다리를 하나 꼽아야 한다면 오랫동안 퐁네프(Pont Neuf)가 으뜸이었다. 1607년 만들어져 역사가 400년 넘었고, 시내 중심지 시테섬을 연결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무엇보다 '퐁네프의 연인들'(1991)이라는 영화로 이름값이 더욱 높아졌다.
그런데 요즘 퐁네프의 아성을 무너뜨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치솟는 다리가 있다. 에펠탑에서 남서쪽으로 600m쯤 떨어진 비르아켐다리(Pont de Bir-Hakeim·사진)다. 파리지앵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청춘들이 몰려들어 결혼 사진이며, 커플 사진을 찍느라 비르아켐다리 위는 늘 붐빈다.
지난달 30일 해 질 녘에 길이 237m의 비르아켐다리를 걸어보니 전문 사진가를 대동하고 스냅 사진을 찍는 커플만 7쌍을 만났다. 시계 디자이너로 일하는 프랑스 남성 니콜라(27)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미국인 여자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포즈를 취했다. 니콜라는 "여자 친구와 동거한 지 3년이 된 걸 기념하고 싶었는데, 이 다리에서 사진을 남겨야 최고의 추억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비르아켐다리는 건축 양식이 독특하다. 다리 상판 위로 장식과 조명이 들어간 철제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위로 전철이 다닌다. 1층은 차량과 사람이 지나고, 2층은 전철이 지나는 방식이다. 사진가들은 에펠탑 바로 앞에 있는 이에나다리(Pont d'Iéna)보다 비르아켐다리에서 찍어야 에펠탑을 적당한 크기로 더 예쁘게 담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흰 턱시도를 입고 웨딩 사진을 찍던 홍콩 젊은이 레오(27)는 "파리의 정취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비르아켐다리는 미국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인셉션(2010)의 배경으로 나오면서 인기가 더욱 불붙었다. 일간 르파리지앵은 지난해 비르아켐다리에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현상을 담은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비르아켐다리 신드롬'을 마냥 반기지 않는 파리지앵들도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던 세르주라는 중년 남성은 "젊은이들이나 관광객들이 이 다리의 이름이 왜 비르아켐인지 알고 사진을 찍으면 더 좋을 것"이라고 했다. 1905년 다리가 완공됐을 때는 주변 지명을 따서 '파시(Passy) 다리'였다. 그랬다가 2차 대전 때 '사막의 여우'로 불린 독일 로멜 장군이 이끄는 전차부대를 프랑스군이 무찌른 '비르아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49년 개명했다. 비르아켐은 전투가 벌어졌던 아프리카 리비아 사막지대 지명이다.
할리우드 영화인 인셉션이 비르아켐다리가 인기를 끄는 발판이라는 것도 문화 강국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프랑스인들로서는 불편한 대목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인셉션다리(#inceptionbridge)'라는 해시태그로 2200장이 넘는 사진이 올라와 있다. 연극학 전공의 대학생 벵자맹 베르토치(24)는 "할리우드 영화 제목이 다리의 이름을 가려버려서 유감"이라고 했다. 1972년 개봉한 유럽 영화의 대작(大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배경이 비르아켐다리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