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전 9시 30분 경기도 성남시 현대백화점 판교점 앞. 개점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정문 앞에는 정장 위에 패딩이나 코트를 입은 남성들300여 명이 200m 넘게 줄을 서 있다. 아침 7시부터 와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현대 판교점의 별명은 '판교 맘들의 아지트'. 그런데도 평일 아침에 청·중년 남성들이 긴 줄을 선 것이다.
"하나, 둘, 셋." 출입문 셔터가 올라가며 사람들이 달려간 곳은 소니 매장 앞. 이 회사가 이날부터 전국 33개 매장에서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4(플스 4) 프로 1TB 등 3개 제품을 정상가 대비 최대 15만원 인하된 가격에 판매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플스 4의 할인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판교점이 준비한 물량은 오전에 모두 동났다.
현장에 있던 A씨는 "셔터가 열리자마자 다들 좀비 떼처럼 뛰어가는데, 바닥을 닦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다들 미끄러지고, 넘어진 사람을 다 밟고 지나가 영화 '월드워 Z'(좀비 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1차로 들어온 200대 물량이 한 번에 완판됐다"며 "가든파이브·울산·천호·목동점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백화점 외 다른 오프라인 매장들에서도 상황은 비슷해 게임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는 "울산 내 3곳을 샅샅이 뒤져 겨우 하나 찾았다" "지금 ○○ 매장에 물량 남아 있습니다" 등의 중계 글이 올라왔다.
남성들의 장난감, 맘카페에서 구입하라?
이런 상황에서도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 플스 4를 사는 사람은 삼류, 다음 주에 중고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이류, 한 달 뒤 맘카페에서 사는 사람은 일류…." 조금만 기다리면 뜯지도 않은 새 제품이 중고나라나 맘카페에 풀리기 때문에 '득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풀리는 제품을 '유부남 피눈물 에디션'이라고 한다. 집안 내 경제권과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아내의 반대로 급처분되는 제품들이다. 그나마 중고나라에 풀리는 건 본인이 직접 처분하지만, 맘카페에 올라오는 건 아내가 직접 처분하는 것이라 더욱 싸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말이 지난 28일부터 중고 거래 사이트에는 이 같은 글이 쏟아졌다.
"플스4프로 2TB+듀얼쇼크(미개봉·신공정) 일괄 판매합니다. 정말 큰맘 먹고 구매했으나 와이프의 강력한 반대로 판매하게 됐습니다."
"플스4 신공정 1테라 미개봉 신제품 판매합니다. 충동구매해서 중고 타이틀까지 같이 구매했지만 와이프의 격한 반대로 판매합니다."
24일 당일에는 한 지역 도시 시의원이 플스 4 를 되팔기에 동참했다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매를 원하는 한 네티즌이 사기 판매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올라온 메일 주소를 검색하다 한 지역 시의회 홈페이지에 있는 한 시의원의 메일 주소와 동일하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해당 시의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이디가 도용당한 것"이라며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려고 준비 중이다"고 말했다.
일부 맘카페에는 이런 과정을 예측하고 플스 4를 사겠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3년 전 플스 4 출시 당시 기혼 개그맨 김재우가 출연한 광고 문구는 이랬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그게 바로 유부남이 사는 길."
플스 4를 사고 싶다면 아내에게 허락받아 사는 것보다, 사고 나서 용서를 구하는 게 더 쉽다는 의미다. 그러나 곧 이를 뛰어넘는 문구가 등장했다. "용서보다 환불이 더 쉽다."
아내 눈치 때문에 취미 용품 못 산다 82.96%
플스 4 대란으로 기혼남들의 취미 활동과 경제권 제약이 화제가 되자, 미혼남들 사이에서는 "진짜 장난감도 마음대로 못 사느냐" "이래서 내가 결혼 안 한다" 등의 성토가 이어졌다. 현실은 어떨까.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와 함께 20~50대 남성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결혼하고도 취미 용품에 관심 있는 남성 중 아내 눈치 보느라 못 사는 장난감이 있다는 대답이 82.96%에 달했다. 특히 20대와 50대 유부남이 평균보다 높았다. 20대 부부의 경우엔 두 사람의 소득 수준이 아직 높지 않아서, 50대 부부의 경우엔 경제권이 아내에게 많이 기운 상황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취미 용품을 사기 위해 비상금을 만든 적이 있다는 대답은 64.86%에 달했다. 비상금의 규모는 10만~30만원이 29.53%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30만~50만원(24.65%), 10만원 이하(16.74%) 순이었다. "제품 가격이 얼마일 때 아내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사느냐"라는 질문에는, 5만~10만원대가 34.54%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5만원 이하(33.33%)였다.
말 안 하고 샀다가 아내에게 빼앗긴 적이 있다는 답변도 36.65%, 중고 거래 사이트에 팔아본 적이 있다는 답변도 39.67%였다. 중고 사이트에 되팔기의 경우 20대는 무려 70.59%, 30대는 44.06%였다.
몰래 샀다가 빼앗기거나 되판 물건 1등은 게임기(20.21%), 그다음이 피겨 등 인형류(16.29%), 스피커 등 음향·영상 기기류(11.31%) 순이었다.
경제권, 누구에게 있나
통계는 우리나라 가정의 경제권이 아내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가족부가 조사한 '2016년 양성평등 실태조사'에 따르면, 배우자가 있는 응답자의 56.9%가 '아내가 수입을 모두 관리하고 남편에게 용돈이나 생활비를 준다'고 답했다. 남편이 관리한다는 비율은 24.9%였다.
최근 중고 거래 사이트에 한 휴대전화 판매업자는 "개인 채무, 엄마·아빠 허락, 와이프 허락 다 보시고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한국 남성은 어렸을 땐 부모님, 청년일 땐 본인, 결혼하면 아내에게 경제권이 넘어간다는 풍자이자 현실일 것이다.
아내가 주도하는 경제는 한국과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만 발견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지난해 한 설문 조사에서 "아내에게 경제권을 넘기고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 이혼하고 싶다"는 답변이 6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누가 경제권을 갖느냐의 문제보다 서로 경제관념에 대해 의견 합의를 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국 심리학자인 브래드 클론츠(Brad Klontz)는 한 개인이 돈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 체계를 '머니 스크립트(money scripts)'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연극 대본을 달달 외워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돈에 대한 관념은 어릴 때부터 체화되기 때문에 부부가 서로 의견 합의를 보는 것이 다른 어떤 갈등 요소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클론츠 박사는 "부부간 갈등의 많은 부분은 경제적인 문제와 연결돼 있다"며 "부부가 상대방의 머니 스크립트를 알고자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한 금전적 협력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방의 소비 습관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인정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