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예비 타당성 조사 없이 국민 세금 24조원을 투입하는 23개 지역 사업 명단을 발표했다. 지역 민원이지만 경제성·사업성이 없는 철도·도로·공항 등으로 시·도별로 1~2개씩 배정해주었다. 아동수당, 일자리 예산 등 이미 타당성 조사 없이 쓴 29조원을 합치면 이 정부 들어 타당성 조사 면제 사업액이 53조원을 넘는다. 조사 면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타당성이 없는 사업이다. 여권이 맹비난하던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22조원)은 물론 박근혜 정부 4년간 타당성 조사 면제액(24조원)의 두 배가 넘는다. 과거 정부의 SOC 사업을 '적폐'로 몰던 정부가 선거가 다가오자 대규모 토목공사 카드를 꺼내 들고 그토록 비아냥대던 이른바 '삽질'을 스스로 시작했다.

세금 퍼붓기는 친문(親文) 인사들이 단체장인 지역에 집중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가 공약한 내륙철도사업(사업비 4조7000억원)이 포함됐다. 전임 지사 시절 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했던 사업이다. 역시 친문 송철호 시장의 울산에는 울산외곽순환도로(1조원), 산재전문공공병원(2000억원) 등 2건이, 오거돈 시장의 부산엔 사상~해운대 고속도로 사업 2조원이 배정됐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의 지역구인 충북은 충북선 철도 고속화 사업(1조5000억원)을 따냈다. 반면 야당 도지사인 경북은 4조원 규모로 신청한 포항~동해 복선전철화 사업이 4000억원짜리로 대폭 축소됐고, 7조원 규모 동해안 고속도로는 타당성 조사 면제 탈락은 물론 추진 가능성을 열어둔 사업 목록에서도 아예 빠졌다.

전북도에 배정된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8000억원)의 경우는 자동차로 1시간 20분 거리에 무안공항이 있다. 누가 봐도 불필요한 중복 사업이다. 무안공항조차 이용객이 수용 능력의 10%에도 못 미쳐 적자 덩어리가 됐는데 인근에 또 공항을 짓는다고 한다. 국정(國政)의 최소한 요건마저 팽개쳤다. 경제성·사업성 없는 지역 민원사업에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을 퍼붓는 이유는 '지역 균형 발전'이란 명목 아래 세금으로 표를 사겠다는 것이다.

애초에 시작부터 정치적 색채가 뚜렷했다. 김 경남지사를 비롯한 친문 단체장이 공동으로 '1시·도 1타당성 조사 면제'를 건의하자, 문 대통령이 신년 회견에서 이를 수용하겠다고 화답해 절차가 진행됐다. 미리 짠 수순이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과 총리, 여당 대표는 지역 방문 때마다 타당성 조사 면제를 언급해 전국에 건설사업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탈락한 지역에선 반발하며 항의 시위를 예고하는 등 벌써부터 후유증도 나타나고 있다.

국민 세금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 정부는 이미 54조원 일자리 예산을 모래 위에 물 붓듯 증발시켰다. 세금 나눠 주는 '현금 복지'는 2년 새 10조원 늘렸다. 이제는 세금 낭비를 막기 위해 도입한 최소한의 장치인 타당성 조사마저 무력화시켰다. 이런 추세라면 이 정부 5년간 누적 적자가 179조원에 달해 이명박(99조원)·박근혜 정부(111조원)를 크게 뛰어넘을 것이다. 세금은 항상 잘 걷히는 것이 아니다. 경기가 나빠져 세수가 줄어드는 시점이 오면 이 모든 사이비 국정이 눈덩이처럼 국민 부담으로 덮쳐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