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질수록 유난히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뜨끈한 국물과 함께 호호 불어 먹는 어묵이 그중 하나. 쫀득쫀득하고 짭조름한 어묵 한입 베어 물면 한겨울 추위마저 낭만이 되곤 한다. '어묵의 도시' 부산으로 떠났다. 전국적인 인기와 명성을 누리는 부산 어묵을 제대로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전통 시장부터 노포(老鋪)까지 '부산 어묵 로드'가 펼쳐진다.

부산 어묵 여기 다 있데이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어묵 천지다. 매장마다 쇼케이스에 수북이 쌓여 있는 어묵들은 그 종류를 헤아리기 어렵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어묵 가게라는 부평깡통시장 어묵 골목엔 크고 작은 어묵 매장 20여 곳이 모여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어묵 브랜드부터 부평깡통시장표 어묵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에서 온 주부 전은주(33)씨는 "가족이 어묵을 좋아해서 부산 올 때마다 필수 코스로 들르는데 부산 어묵이라도 가게마다 맛과 종류가 달라서 매번 고르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범표어묵 부평점 이홍기(59) 대표는 "사각 어묵 등 옛날 어묵과 청양고추, 치즈, 새우 어묵 등 여기 있는 어묵 종류만 20개가 넘는다"며 "밀가루 대신 감자 전분을 쓰고 어육을 88% 사용해 탱탱하고 담백한 게 우리 어묵의 특징"이라고 했다.

부산 어묵의 원조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1945년 문을 연 '동광식품'은 한국인 최초로 세운 어묵 공장이다. 1910년 '부평정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시장엔 일본인들을 위한 '가마보코(かまぼこ)' 전문점이 있었다. 가마보코는 생선 살을 으깨고 반죽해 굽거나 찌거나 튀긴 생선묵 형태의 일본 음식이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설비와 기술로 가마보코를 우리 식으로 발전시켰다.

1950~60년대부터 어묵 공장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부평깡통시장 어묵협동조합 회장을 맡고 있는 부평식품 김병현(60) 대표는 "1970년대만 해도 시장 안에 어묵 공장들이 모여 있었지만 화재가 잦고 냉장 보관 문제 등으로 장림 공단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판매만 하는 매장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부산 어묵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위생과 미관을 고려해 어묵 골목도 깔끔하게 정비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묵, 새우, 소라, 문어, 한우 힘줄(스지) 등이 푸짐하게 들어간 '백광상회'의 부산식 '오뎅'.
어묵 공장에서 체험하는 어묵 만들기

부산 어묵의 시초인 동광식품은 1982년 범천동 중앙시장으로 이전하여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묵 공장은 1953년 문을 연 삼진어묵이다. 삼진어묵 창업주는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배운 어묵 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영도 봉래시장에 어묵 공장을 열었다. 60년 넘게 부산 어묵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삼진어묵 공장에선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2013년 오래된 어묵 공장을 깔끔한 빵집처럼 바꾸며 어묵 베이커리형 매장으로 변신했다.

반찬, 꼬치로만 소비되던 어묵 대신 '어묵 고로케' 등 새로운 어묵 메뉴와 프리미엄 어묵을 내놨다. 영도본점엔 60종의 어묵이 있다. 폐쇄적이던 공장 시설은 매장에서도 누구나 어묵 제조 과정을 볼 수 있도록 오픈형으로 바꿨다. 3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회사에 들어온 창업주 손자 박용준(36)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삼진어묵 매출은 5년 새 10배 이상 성장했고 해외에도 매장 5개를 열었다. 삼진어묵의 브랜드는 물론 부산어묵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베이커리형 매장으로 변신한 삼진어묵 영도 본점.

삼진어묵 본점 2층 삼진어묵체험역사관에선 어묵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대구에 사는 주부 이미영(38)씨는 "직접 만든 어묵을 맛보니 뿌듯하다"며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어서 색다른 추억이 됐다"고 했다. 어묵 체험 프로그램은 월~금요일 성형 어묵, 피자 어묵 만들기가 하루 3회, 주말·공휴일 구이 어묵, 피자 어묵 만들기가 하루 6회 진행된다. 체험 예약은 카페나 전화로 하면 된다.

어묵 만들기 체험은 고래사어묵 해운대점에서도 해볼 수 있다. 1963년 부전시장에서 문을 연 고래사어묵도 부산 어묵을 대표하는 오래된 업체 중 하나다. 해운대점에서 여는 쿠킹 클래스에선 어묵초밥, 어묵김밥 등을 직접 만들어본 뒤 맛볼 수 있다. 화~금요일 오후 3시, 주말 오후 12시·3시. 예약은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1 어묵과 맥주의 신선한 조합을 즐길 수 있는 '영진어묵&공감카페'의 '어맥세트'. 2 수제로 만드는 '어묵 고로케'는 삼진어묵이 개발한 최고 히트 상품이다. 3 부산 최대의 어묵 시장인 부평깡통시장 어묵 골목에선 다양한 어묵을 맛보고 구입할 수 있다. 범표어묵 부평점의 쇼케이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20여종의 어묵들.
치맥? 부산에선 어맥!

부산항대교와 북항, 부산역 일대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있는 카페의 메인 메뉴는 커피가 아니라 '어맥 세트'다. 맥주와 궁합 맞춘 건 다름 아닌 '어묵 앤 칩스'. 기름에 갓 튀겨내 바삭한 어묵과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의 조화는 낯설지만 신선하다. 어맥 세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영진어묵&공감카페다. 초량산복도로를 따라 조성된 '이바구길'에서 만날 수 있다.

영진어묵은 초량전통시장에서 1966년부터 50년 넘게 어묵을 만들어 오고 있다. 동구노인종합복지관과 연계해 지역 어르신들의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영진어묵의 어묵을 판매하는 색다른 공간은 168칸의 계단이 있어 '168계단'이라 부르는 가파른 계단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68계단엔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는데 모노레일 탑승을 기다리다 보면 고소한 어묵 냄새에 이끌려 카페 문을 열게 된다.

주문 즉시 기름에 튀겨내는 어묵과 감자튀김은 소리부터 맛있다. 어묵 고로케와 어묵바, 말이 어묵 등 다양한 어묵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모듬 어묵 앤 칩스'가 가장 인기다. 국산 맥주부터 수입 맥주까지 맥주 라인업도 다양하다. 파노라마 전망이 펼쳐지는 카페 창가에 앉아 어묵과 맥주를 먹다 보면 어묵도 충분히 우아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묵과 맥주의 조합이 궁금해 일부러 찾아왔는데 맛도 분위기도 만족스럽네요." 대전에서 왔다는 대학생 조효진(25)씨가 말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김우분(63)씨는 "주말이면 가족끼리 와서 어묵과 맥주, 커피를 함께 즐기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어묵탕 추천도 잊지 않았다.

커피와 어묵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미도카페.

미도카페는 어묵과 커피의 조합이 돋보인다. 1963년부터 부평깡통시장에서 어묵을 만들어온 부평동의 터줏대감 미도어묵이 만든 카페. 시장 안 매장에선 어묵 구입만 가능한 데 비해 이곳에선 어묵 구입과 함께 어묵으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어묵면으로 만든 우동과 짬뽕, 파스타, 떡볶이 등 이색 메뉴가 기다린다. 1층 매장을 지나 2~3층으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커피잔과 주전자, 그라인더 등 커피 박물관에서 볼 법한 물건들이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어묵과 좋은 커피를 함께'라는 공간의 취지답게 어묵 요리도 커피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카페 한쪽의 미도어묵 미니 역사관도 눈여겨볼 것.

◆ 부산어묵로드 추천 맛집

백광상회

: 60년 전통의 선술집. 어묵과 곤약, 유부, 무 등을 넣어 끓여 먹는 일본식 탕 요리 오뎅(おでん)을 부산식으로 재해석한 '오뎅'이 대표 메뉴. 부평깡통시장표 어묵과 소라, 문어, 새우, 한우 힘줄(스지) 등 17가지 재료를 접시에 모두 담고 뜨거운 육수로 여러 번 데운 뒤 국물을 자작하게 담아 낸다. 겨울엔 토란과 미역이, 여름엔 감자가 더해진다. 쌈장과 겨자 섞은 소스도 별미. 부산 중구 남포길 25-3

미소오뎅

: 어묵과 맥주가 맛있는 분위기 좋은 오뎅바. 12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메인 좌석은 늘 만석이다. 주인장이 엄선한 20여 종의 어묵 꼬치는 고르는 것마다 실패가 없다. 부산에서만 먹을 수 있는 떡 꼬치는 따로 주문하면 된다. 가마솥에 멸치와 소 힘줄(스지) 등을 넣어 푹 끓인 깔끔한 육수가 깊은 맛을 낸다. 어묵만큼 맥주를 좋아하는 주인장 덕에 에비스 생맥주와 이네딧 담 등 맥주 라인업도 화려하다.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14

명성횟집의 오뎅백반.
명성횟집

: 이름은 횟집이지만 오뎅백반으로 유명한 50년 된 노포.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푸짐한 오뎅백반과 회백반은 언제나 인기 메뉴. 오뎅백반이라고 해서 오뎅이 허술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어묵과 유부 주머니, 낙지, 무, 계란 등이 들어간 알찬 한 그릇을 대접받는다. 갖가지 밑반찬까지 더해지면 밥 한 그릇 뚝딱이다. 생선회나 생선초밥과도 세트로 즐길 수 있는 오뎅탕은 술안주로 일품. 부산 동구 고관로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