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성매매업소 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에도 한가위는 찾아왔다. 성매매업소 사이에 자리한 수퍼에는 사과, 배, 참치, 햄 등 선물 상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성매매 여성과 업주들이 서로에게 줄 추석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미아리 텍사스 한복판에 자리한 '건강한 약국' 약사 이미선(57)씨는 골목을 지나는 성매매 여성들을 불러 세웠다. "이거 마지막 추석 선물이야." 이씨는 여성들에게 로션을 하나씩 건넸다. 한 여성은 "역시 우리를 챙겨주는 사람은 '약사 이모'밖에 없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한때 450여 개 성매매업소가 영업했던 미아리 텍사스가 내년 사라진다. 재개발조합에 따르면 현재 남은 80여 개 업소를 내년 이주시키고 동네를 고층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재개발 예정이다. 가게가 모두 문을 닫으면 24년간 여기서 약국을 운영해온 이씨도 떠난다.

성매매업소 집결지인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미아리 텍사스에서 24년간 성매매 여성들에게 무료 상담을 해온 이미선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약국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씨 뒤쪽으로 보이는 성매매업소는 내년 철거될 예정이다.

이씨가 약국을 연 것은 1994년이었다. 성매매 여성들을 위해 무료 상담을 해주고, 약국에 책을 가져다 놓고 빌려줬다.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비누 만들기 교실을 열기도 했다. 이곳을 거쳐 간 여성들은 이씨를 '약사 이모'라고 부른다.

이씨는 집창촌이 있는 하월곡동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이씨를 귀여워했던 술집 종업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어른이 되면 집 근처에 공장을 지어 집창촌 사람들, 술집 언니들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약사가 된 이씨는 공장 대신 약국을 세웠다.

이씨는 친해진 여성들에게도 "얼른 집창촌을 떠나라고 다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약국은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오는 곳이잖아요. 그들도 스스로 여기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내가 굳이 잔소리를 더 보탤 필요가 있나요. 고민을 들어주고 병원이나 행정 업무를 도와주는 게 자립을 돕는 더 빠른 길일 수 있어요."

성매매 여성과 업주들은 이날도 이씨의 약국을 찾아 "여기 철거되면 어디 가서 뭐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상당수 성매매 여성은 "철거 전날까지 영업해서 일당을 버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날 약을 사러 온 30대 후반 여성은 2년 전 미아리 텍사스를 떠났던 사람이라고 했다. 이씨가 환히 웃으며 "못 보던 사이에 살이 많이 빠졌다"며 반겼다. 어쩌다 다시 미아리 텍사스로 돌아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씨가 로션을 건네며 "추석 때 심심하면 놀러 오라"고 하자 여성은 "나를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성매매 여성 대부분은 명절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업소에서 지낸다. 삼삼오오 모여 전을 부치고 갈비찜이나 떡을 만들어 나눠 먹는다고 한다. 이씨는 "명절이라 더 외로우니까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기분을 낸다"고 했다.

하지만 업소 사정이 나빠지면서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씨는 "1~2년 전부터는 일수 쓰라는 명함이 매일 2~3개씩 가게 앞에 깔리는 걸 보면서 경기 침체를 체감한다"고 했다.

약국이 철거되면 이씨는 20년 넘게 지켜본 미아리 텍사스 이야기를 책으로 낼 생각이다. "성매매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곳 사람들은 주민센터 가는 것을 꺼릴 정도로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며 "무조건 비난하거나, 직업을 바꾸면 돈을 얼마 쥐여 주는 게 아니라 이들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