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0시 평양 국제비행장. 전용기에서 내린 문재인 대통령에게 낯익은 얼굴의 화동(花童)이 다가와 꽃다발을 건넨 뒤 팔꿈치를 굽혀 머리 위로 경례를 붙이는 '소년단 경례'를 했다. 통제와 조작으로 점철된 북한의 실상을 고발했던 러시아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 아래'의 주인공 리진미(12)양과 매우 흡사했다. 외교가에선 "진미양의 안위를 걱정하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영악한 연출이자 고도의 체제 선전술 같다"는 말이 나왔다.
2016년 4월 개봉한 '태양 아래'는 러시아의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2014년 방북해 만든 영화다. 그는 진미(당시 8세)가 조선소년단에 가입해 김정일·김일성 생일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과 평양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진미의 집과 부모 직업을 조작하고, 이들의 대사와 동선까지 멋대로 연출하자 계획을 바꿨다. 북한 각본대로 찍는 척하며 '몰래 카메라'를 동원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조작이 판치는 북한의 '불편한 진실'을 기록한 것이다.
감시원 몰래 찍은 마지막 신에서 진미는 제작진이 소년단 입단 소감을 묻자 대답을 하다 말고 울음을 터뜨린다. 제작진이 진미를 달래기 위해 "좋은 것, 좋은 기억을 생각해보라"고 해도 진미는 "잘 모른다"고 하고, "시를 떠올려보라"고 하자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는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세워주시고…'로 시작하는 조선소년단 입단 선언문을 낭독한다.
북한은 영화가 자신들 의도와 정반대로 제작된 것을 뒤늦게 파악하고 러시아 측에 강력 항의했다. 영화가 공개된 뒤 진미와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진미를 그해인 2016년 5월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제7차 노동당 대회 경축 군중대회에 등장시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꽃다발을 건네게 했다. 고위 탈북자 A씨는 "북한 당국이 국제사회의 인권 공세에 맞서 진미를 활용하는 듯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