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자를 쓰는 사람들은 대개 세 종류였다. 눈에 안 띄려는 연예인, 낚시나 등산으로 시름을 덜려는 중년, 아니면 정처 없는 거리의 부랑자. 양동이(bucket)를 뒤집어쓴 듯 챙으로 눈까지 슬쩍 가릴 듯한 스타일, 바로 버킷 햇(bucket hat)이다. 한국에선 벙거지 모자로 불린다. 대충 눌러쓴 모습에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모자가 여름·가을 패션계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 해보고 싶은 것들)'로 뜨고 있다.
고유의 노바 체크를 살린 버버리 체크 버킷 햇은 그라피티, PVC 등 다양한 소재와 패턴으로 변주해 선보이는 족족 매진을 기록했다. 올 시즌 '복조리 백'으로 불리는 '버킷 백'이 인기를 끌며 회생한 프라다는 이번 가을 시즌 남성컬렉션 모델들에게 버킷 햇을 씌우며 그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삶을 초월한 듯한 도인 같은 스타일을 자주 선보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디자이너를 교체한 뒤 한결 젊어진 마르니, 넉넉하지만 간결한 재단으로 마니아층을 보유한 스웨덴 브랜드 아크네 스튜디오 등도 버킷 햇을 대표 액세서리로 선보였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1960년대 TV 드라마를 통해 유행했던 버킷 햇이 올 들어 폭염만큼이나 가장 '핫(hot)한' 패션 아이템이 됐다"며 "어르신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깨고 나이대에 상관없이 모두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GQ 등 해외 패션 매체는 "머리카락을 위한 보호막 역할도 해줘 양산 쓰기 꺼리는 남성들에게 그늘막 같은 존재"라고 했다.
패션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버킷 햇은 한때 가장 인기 있는 액세서리 중 하나였다. 1980~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미국 힙합 가수 런 디엠시(Run-Dmc)나 LL쿨제이 등은 버킷 햇을 낚시터용 모자에서 패션 아이템으로 바꿔 놓았다. 영국의 유명 록밴드 스톤 로지스의 드러머 레니나 오아시스의 리엄 갤러거 역시 버킷 햇 마니아였다. 국내에선 1992년'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당시 서태지가 쓰고 나와 큰 인기를 끌었다.
버킷 햇 돌풍은 20년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패션계 '20년 주기설(說)'을 뒷받침하고 있다. 주춤했던 인기가 2010년대 들어 미국의 힙합 뮤지션 스쿨보이 Q와 스웨덴 영린(Yung lean)을 통해 다시 부활했다. 기존엔 면이나 폴리에스터 소재에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화려한 색상과 그래픽, 각종 무늬를 가미해 한층 현란해졌다.
몇 년 전부터 꾸미지 않은 듯한 놈코어(normal+hardcore·평범한듯 비범한 패션)가 인기를 끌면서 안 꾸민 듯 계산된 멋스러움을 풍기기에 최적의 아이템으로 꼽히는 게 버킷 햇이다. 최근 들어선 힙합·스트리트풍 의상뿐만 아니라 정장 스타일이나 원피스에도 곁들인다. 머리나 얼굴 크기와 상관없이 대체로 잘 어울리고, 야구모자나 비니가 어색한 중년들에게도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