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 전 건국대 정외과 석좌교수

1948년 7월 20일에 이시영과 함께 정·부통령에 당선되고 24일에 취임식을 거행했을 때만 해도 이승만 대통령의 전도는 어둡지 않았다. 이때 그는 자만했을 수도 있다. 눈앞에 닥친 국무총리 지명 문제에서 여론과 국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의 편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조소앙이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점을 들어 "단정(單政) 반대의 의혹이 풀릴 때까지는 어렵다"며 배제했다. 이승만으로서는 조소앙의 국제사회당(SI) 참여나 그의 카리스마가 버거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일반의 예상을 깨고 국무총리로 지명한 조선민주당 부당수 이윤영이 7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193표 가운데 찬성 59표, 반대 132표, 기권 2표로 압도적으로 부결되었을 때 이승만은 당황했다.

이윤영은 자신이 이북 출신인 데다가 이승만에게 배신감을 느낀 한민당의 반란 표로 이런 일이 빚어졌다고 회고했다. 한민당으로서는 초대 국무총리가 자기 당 당수인 김성수의 몫이라고 기대하고 있던 데다가 목사인 이윤영의 친(親)기독교적 노선도 마음 내키지 않았다. 당초에 이승만은 김성수의 능력과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여 재무부장관 정도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한민당으로서는 이를 불만스럽게 여겨 거부했다.

국내 민족 진영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와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을 놓고 고민하다가 이범석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지명함으로써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그에게는 이범석을 통하여 임정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내파 민족주의 세력의 도전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8월 2일 이범석의 국무총리 승인안이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국회에서 어렵게 가결됐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3일에 국방부장관 이범석(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 법무부장관 이인, 농림부장관 조봉암, 교통부장관 민희식, 내무부장관 윤치영, 문교부장관 안호상, 사회부장관 전진한을 임명했다. 이어 이튿날인 4일 상공부장관 임영신, 체신부장관 윤석구, 외무부장관 장택상, 공보처장 김동성, 법제처장 유진오를 임명했다. 내각을 이틀에 걸쳐 발표한 것 자체가 이승만의 고심을 보여준다.

1948년 8월 5일 열린 대한민국 첫 국무회의 모습. 왼쪽부터 민희식(교통), 전진한(사회), 안호상(문교), 김도연(재무), 장택상(외무), 이범석(국무총리 겸 국방), 이승만 대통령, 윤치영(내무), 임영신(상공), 이인(법무), 윤석구(체신), 조봉암(농림), 김동성(공보), 유진오(법제).

대한민국 첫 내각 13명의 출신·학력·노선을 보면 서울이 4명(이범석·민희식·윤치영·유진오), 영남이 4명(이인·안호상·전진한·장택상), 경기가 2명(김도연·조봉암), 황해(김동성)·충청(윤석구)·호남(임영신)이 각 1명이었다. 서울과 영남이 많고 호남이 적은 것은 호남 출신인 김성수와의 거리감 때문으로 이승만과 한민당의 유착설이 사실이 아님을 방증해 준다. 학력을 보면 미주 5명(김도연·민희식·윤치영·임영신·김동성), 유럽 3명(조봉암·안호상·장택상), 일본 2명(이인·전진한), 중국 2명(이범석·윤석구), 국내 1명(유진오)이었다. 이념으로 보면 조선공산당 출신인 조봉암과 노동운동 출신인 전진한을 제외하면 대체로 보수우파였다. 국내파가 소외된 것은 35년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경영에 참여할 인재가 양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이승만의 선택에는 그 나름의 애로와 고충이 있었다. 독립투사로서의 후광만으로 정치를 하기에는 그의 핵심 지지 세력인 재미(在美) 그룹의 실체와 기반이 허약했고, 또 그들 모두가 이승만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외 투쟁에 못지않게 내부 알력에 시달렸다. 그러던 차에 미주 출신인 장덕수를 매개로 하여 국내의 보성전문 그룹과 손을 잡았을 때 그에게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 정국의 격정 속에서 한민당에 대한 거부 정서가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승만으로서는 그의 중심 지지 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만으로는 정국을 주도할 수 없게 되자 국회에서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무소속과 한민당은 물론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청년단·민족청년단·농민연맹 등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 한민당보다도 더 세력이 막강한 무소속의 설득을 윤치영에게 일임함으로써 가까스로 조각을 완수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한국현대사 연구를 지배하고 있는 몽환적인 전제, 즉 이승만이 한민당을 기반으로 하는 친일 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을 출범·유지했다는 주장은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첫 내각 13명 가운데 명시적으로 친일 인사로 볼 수 있는 인물은 두 명, 선대가 친일이었던 인물은 한 명 정도였다.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해서 이범석·김도연·이인·조봉암 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다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승만이 당초부터 친일파에 기댄 것은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 정권의 친일 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의 차이이며, '먼저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