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의 모자에서 래퍼의 모자로 뜬 벙거지
90년대 복고풍 유행에 따라 '명품 패션' 되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난 알아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 모자가 반가울 것이다. 1990년대 길거리를 강타했던 벙거지가 최신 유행으로 떠올랐다. 올봄 길거리 브랜드부터 명품까지, 벙거지를 주요 액세서리로 선보였다. 버버리의 체크 벙거지부터 캉골의 벙거지까지, 취향대로 입맛대로 골라 쓰기만 하면 된다.
버킷햇(Bucket Hat)이라고도 불리는 벙거지는 처진 챙이 달린 양동이 형태의 모자로, 1900년대 아일랜드의 농부와 어부들이 작업 모자로 착용한 것이 유래다. 친근하면서도 말괄량이 같은 분위기로 1970년대 할리우드 배우 로렌 허튼이 써서 패션 모자로 주목을 받았고, 1980년대 들어선 엘엘 쿨제이(LL Cool J)와 런 디엠씨(Run DMC) 등 래퍼들이 착용하면서 길거리 문화와 힙합 패션의 대명사가 됐다. 국내에는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쓰고 나오면서 인기를 끌었다. 당시 펑퍼짐한 셔츠와 바지에 벙거지를 눌러 쓰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 교복처럼 통했다.
이후 벙거지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가, 등산과 아웃도어 패션의 유행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비와 바람에도 거뜬한 기능성 소재로 만들어진 아웃도어 벙거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머리에 씌워져 명맥을 이어갔다. 젊은이들이 벙거지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3~4년 전, 힙합과 길거리 패션이 부상하면서다. 여기에 길거리 패션이 명품을 잠식하면서, 자연스레 고급 패션으로 편입됐다.
영국 브랜드 버버리는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와의 협업을 통해 체크 벙거지를 유행시켰다. 버버리의 트렌치코트에 사용되는 개버딘(Gaberdine·방수 코팅 처리를 한 면) 원단과 노바(Nova) 체크를 접목한 벙거지는 ‘젊은 버버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 명품 샤넬도 벙거지를 선보였다. 샤넬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트위드 재킷에 PVC(polyvinyl chloride·폴리염화비닐)로 만든 벙거지를 씌웠다. 장난스러워 보이는 투명한 벙거지는 134만원이란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해외 패션 애호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벙거지의 인기는 겨울까지 이어질 태세다. 이탈리아 명품 프라다는 매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전성기 시절 인기를 끌었던 나일론 가방과 벙거지를 소환했다. 2018 가을/겨울 패션쇼에서 프라다는 얇고 긴 빨간색 프라다 로고가 들어간 벙거지를 거의 모든 모델의 머리에 씌워 프라다의 부활을 염원하는 상징처럼 활용했다.
대중문화는 물론 패션까지 90년대 복고풍이 맹목적으로 활용되는 지금, 당시 유행하던 벙거지가 돌아온 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르겠다. 최근 컴백한 걸그룹 EXID도 헐렁한 의상에 캉골의 벙거지를 쓰고 나와 90년대 X세대 스타일을 재현했으니 말이다.
벙거지는 실용적이면서도 패션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줘 놈코어 룩(Normcore Look·평범함을 추구하는 차림새)을 연출하기 좋다. 단순한 옷에 포인트를 주기도 제격이다. 무엇보다 벙거지는 90년대 스타일과 만나면 빛을 발한다. 헐렁한 바람막이 점퍼나 아노락(Anorak·모자가 달리고 전면이 개방되지 않은 재킷), 못생긴 운동화와 패니 팩(Fanny-pack·허리에 둘러매는 작은 가방) 등 복고 열풍으로 부활한 패션 아이템과 매치해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