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국 부자를 연구하는 후룬(胡潤)연구소의 연례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중국 2위 부자 반열에 오른 리수푸(李書福·사진) 지리자동차(영문명: Geely) 회장이다. 리 회장은 8년전까지만 해도 부자 순위 148위에 그쳤으나, 지난해 10위로 급상승한 데 이어 올해는 중국 1위 마화텅(馬化騰) 텐센트 회장을 넘보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리 회장이 이끄는 지리자동차 역시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며 거침 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10년 스웨덴 볼보의 지분 100%를 집어 삼켰던 지리자동차는 지난달 말엔 독일 벤츠 제조사 다임러의 지분 9%를 사들여 순식간에 다임러의 최대주주 지위를 꿰찼다. 업계에 미친 충격이 워낙 컸던 터라 독일 경제부 장관까지 직접 인터뷰를 자청해 ‘예의주시하겠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최근 안방보험·HNA 등 중국 톱기업들이 시진핑 주석의 반부패 칼날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숨을 죽이는 가운데, 리 회장의 행보는 독보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가 이렇게 질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 저장성 인맥으로 정계와 밀접한 관계 맺어

금융업계가 최근 지리자동차의 행보에서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약 10조원에 달하는 다임러 지분 인수 자금의 출처다.

지리자동차는 지난해 11월 전기차 기술 제휴를 위해 지분 5%를 사들이겠다고 다임러 측에 제안했으나, 다임러 측은 베이징자동차(北京汽車), BYD 등과의 협력관계를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지리자동차 측은 현금을 동원해 주식시장에서 직접 지분을 매집했다.

지리차의 전기차 브랜드인 링크앤코의 SUV 모델

지리자동차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이 인수 자금과 관련, “중국 본토에서 나온 자금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처럼 외환규제가 심한 국가에서 조단위 규모의 외화 자금을 동원하려면 중국 당국의 묵인 혹은 암묵적인 지원이 필수라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리 회장은 시 주석이 저장성(浙江省)의 당 서기였을 당시부터 시 주석과 꽌시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저장파의 핵심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 주석 취임 이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에 3차례 연임했고, 중국 최대의 경제단체인 중화전국공상연합회 부주석도 맡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작용해서였을까. 지리자동차의 다임러 인수 당시 관영 언론인 신화통신은 “지리의 합병은 윈·윈 전략”이라고 칭찬하는 사설을 게재하며 이례적으로 지원 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시진핑의 눈 밖에 난 것으로 알려진 안방보험이 하루아침에 국유화가 되는 것과 대조적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 시진핑 비호 속에 공격적 M&A로 사업 확장

리 회장의 성공은 ‘자동차 굴기’를 추진 중인 중국 정부와 ‘자동차 왕국’을 꿈꾸는 둘의 목표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3년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台州) 출생의 리 회장은 고교 졸업 후 사진관을 하며 모은 돈으로 1986년 냉장고 부품 공장을 세우며 사업의 세계에 첫 발을 디뎠다. 젊은 시절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배경 덕분에 그는 중국 정부가 강조하는 “대중의 창업, 만인의 혁신(大衆創業, 萬衆革新)”의 대표 모범 사례로도 꼽힌다.

리수푸 회장의 젊은 시절 사진

그가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6년 국영 회사였던 지리자동차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자동차 분야 초보였던 리수푸는 자동차에 빠진 후 벤츠를 직접 분해할 정도의 열정이 넘쳤다. 1998년 첫 자동차 생산에 이어 2002년 한국의 대우차 생산설비를 도입해 ‘지리CK’란 차종을 출시했다. 2006년 그는 야심차게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출품도 시도했다.

그러나 해외 기업과 경쟁하기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데다 저가자동차 생산만으로는 사업 확장에 한계를 느꼈던 그는 해외 유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합병하는 방식으로 승부수를 띄우기 시작했다.

리 회장은 2010년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로부터 볼보를 사들인 것을 출발점으로, 2013년엔 영국 택시 ‘블랙캡’을 생산하는 망가니즈 브론즈를 인수했다. 지난해 5월엔 말레이시아 자동차 업체 프로톤의 주식 49.9%를 인수하고, 프로톤이 보유하던 영국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 지분 51%도 매입했다. 작년 11월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로 유명한 미국 실리콘밸리 업체 테라퓨지아를 인수한 데 이어 12월엔 볼보상용차의 최대주주가 됐다.

최근엔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지분 매입을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지리자동차의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중국의 국가적 후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차 시장의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로컬브랜드를 육성하는 동시에 중국 차 업체와 부품회사를 2025년까지 글로벌 10위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을 내걸고 해외기업 인수나 자동차 업계 통합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