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익 논설위원

달포 전 일본에 잔잔하지만 의미 있는 문화적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와나미(岩波) 출판사가 일본어 사전 '고지엔(広辞苑)' 7판을 낸 것이다. 일본은 각종 사전(辭典·事典)이 1만 종 넘는 '사전 왕국'이다. 이런 나라에서 수많은 국어사전 중 하나가 개정판 또 낸 게 대수로운 일이냐 할 수 있다. 그러나 손가락 몇 번 누르면 인터넷에서 온갖 사전을 거저 볼 수 있는 시대다. 상업 출판사가 큰돈 들여 새로운 종이사전을 시장에 내놨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올가을 출판계 관심은 미야자와 리에와 '고지엔'이다." 1991년 11월 일본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18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의 충격적 누드 사진집 '산타페'와 '고지엔' 4판 개정본이 밀리언셀러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결과는 '고지엔'의 완승이었다. 총 220만부가 판매돼 '산타페' 150만부를 훌쩍 넘어섰다. '고지엔'은 보통 국어사전은 아니다. 그렇다고 '고지엔' 7판이 이런 옛 영화(榮華)에 기댄 것만은 아니다.

국어사전 개정판을 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네 모든 사고(思考)의 출발점인 말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정의(定義)한다는 것이다. '고지엔' 7판에는 25만개 어휘가 실렸다. 개정에는 6년 동안 이와나미의 10명 넘는 사전팀과 외부 전문가 220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2008년 6판 이후 수집된 10만개의 어휘 후보 가운데 1만개를 골라 새로 실었다. 이미 수록돼 있는 어휘들도 모두 전문가들이 검토하고, 필요하면 다시 쓰도록 했다. 새로 올라간 어휘는 쿨비즈, 레전드, 혼활(婚活), 살처분, 게릴라호우, 딥러닝, 동일본대지진, 안전신화 같은 것들이다.

'고지엔'은 10여년마다 한 번씩 이 같은 작업을 해왔다. 시민들에게도 참여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일본 최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같은 사람도 뜻풀이에 참여했다고 한다. 사전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벽을 향한 개선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건 중요하다. 일본에는 이런 국어사전이 여럿 있다. 개성도 뚜렷하다. 말을 다루고 표현하는 일이 문화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할 때 이는 대단한 힘이다.

일본도 '종이사전 퇴조' 현상을 겪고 있긴 하다. '고지엔'도 1998년 5판 100만부, 2008년 6판 50만부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7판은 올 6월까지의 판매 목표를 20만부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종이사전 사기 위해 1만5000엔(보급판 9000엔)을 쓰는 사람이 20만명이나 된다는 건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부실한 사전을 무료로 이용하기보다는 돈 쓰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전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본의 국어사전을 지탱하는 힘이다. '고지엔'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도 15부 팔렸다고 한다.

우리는 국어사전 시장 자체가 죽어버렸다. 사람들이 포털을 찾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에 남아 있던 사전팀은 해체됐다. 그러니 개정 경쟁을 통해 사전의 질을 향상시킬 기회도 사라졌다. 국민 세금으로 만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1999년 초판 발행 이후 한 번도 개정판을 낸 적이 없다. 온라인상에서도 본격적인 개정은 하지 않는다. 실어야 할 것과 안 실어도 될 것을 구분 못하고, 단어의 가장 적확한 뜻도 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온라인 사전이 대세라면 독자들이 온라인 국어사전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자는 목소리라도 내야 한다. 국어사전의 차이가 한국과 일본에 어떤 지력(知力) 격차를 가져오는지 생각하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