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너희 고양이가 심쿵하게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데 '심쿵'을 영어로 어떻게 하냐는 질문이 들어왔네요? '잇츠 하트 비트. 쏘쏘쏘 큐트(It's heart beat. So so so cute!)'라고 말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김영철)
"또 너무 나갔다(웃음). 한국 사람들도 정말 많이 쓰는 세 마디 영어 감탄사 있잖아요. 그걸 써봐요." (타일러)
"오…, 오 마이 갓?" (김영철)
"그렇죠! '오 마이 갓, 하우 큐트(Oh my god, How cute!)'라고 하면 돼요(웃음)." (타일러)
두 사람 수다를 듣다 보면 무릎을 치게 된다. 울산에서 나고 자란 개그맨 김영철(44)과 미국 버몬트 출신 타일러 라시(Rasch·29)다. 이들은 지난 1년 넘게 SBS 라디오 '김영철의 파워FM'에서 '진짜 미국식 영어(진미영)'라는 코너를 진행했다. 청취자들이 갖가지 영어에 얽힌 고민을 전하면, 먼저 서울 강남 영어학원서 새벽마다 공부했다는 토종 한국인 김영철이 머리를 굴리며 문장을 만든다. 가령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를 영어로 말하고 싶다는 사연에 김영철이 손가락을 튕기며 이렇게 외치는 식이다. "'아이 윌 트라이(I will try)' 맞죠? 아니면 '아이 윌 두 댓(I will do that)!" 타일러는 답을 첨삭하는 '빨간 펜 선생님'이다.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아이 윌 기브 잇 어 트라이(I will give it a try)가 더 자연스러워요."
두 사람이 최근 라디오·팟캐스트 인기에 힘입어 책 '김영철·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위즈덤 하우스)를 냈다. 출간 3주 만에 3쇄를 넘겼다. 6일 서울 목동 SBS 사옥에서 만난 두 사람은 "단순한 영어회화책을 내고 싶진 않았다"면서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책"이라고 했다.
문턱에 선 한국인
―영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 생각 차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는 건가요.
타일러 "맞아요, 한국 사람은 공부를 참 많이 해요. 뭐든지 빨리 습득하고 방대한 정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죠.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게 1989년이라고 들었어요. 제가 태어난 다음 해 비로소 한국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다녔다는 얘기예요. 근데 보세요. 요즘 한국 사람이 안 가는 곳 있나요? 짧은 시간에 참 빨리 변한 거예요.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그걸 소화해서 한국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직 자신감이 없어 보여요. 영어회화는 그런 한국 사람이 겪는 문제 중 일부일 뿐이죠. 문턱을 넘을까 말까 고민하는 친구를 보는 느낌? 그 옆에서 저희가 등을 팍 밀어주고 싶었다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요(웃음)?"
김영철 "제가 영어 공부 시작한 게 2003년 9월 1일이에요. 직전에 캐나다 몬트리올 코미디 페스티벌에 다녀왔어요. 외국인들 앞에서 너무 농담하고 싶고 웃기고도 싶은데 영어가 짧으니 맘대로 안 됐어요. '나 정말 공부 좀 해야겠다!' 이러고 돌아와서 9월 첫날부터 15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부한 거죠. 그사이 영어책도 내고 강연도 다녔어요. 이쯤 되면 제가 뭐 좀 된 것 같잖아요(웃음)? 근데 타일러랑 대화하면서 판판이 깨지는 거예요. '아니 15년 했는데도 이런 표현 하나 똑 떨어지게 말 못 한단 말야?' 싶었죠. 근데 6개월쯤 코너 하고 나니 눈에 붙은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답답함이 좀 사라진 거죠!"
―답답함이 어떻게 사라진 거죠?
김영철 "딱 얻어맞듯 깨달았어요. '내가 영어를 하면서도 한국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 가령 제가 병원에 진료 예약을 한다 해봐요. 한국 사람은 설명이 많아요. 한 자락 깔아주고 시작하죠.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영철이고요, 이 병원은 처음 왔어요. 어디 어디가 아픈 것 같은데 예약이 수요일 아침에 될까요?' 뭐 이러잖아요? 근데 영어로 그렇게 말하면 외국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들어요. '얘가 대체 뭘 말하려고 이러나' 하는 거죠. 그냥 딱 요점부터 들이밀어야 하는 거예요. '헤이, 수요일 아침 예약돼요?' 이러면 끝인 거예요. 제가 그걸 몰라서 헤맸다는 걸 요즘 확실히 알았죠."
타일러 "가령 식당 가서 뭐가 맛있냐 물어본다 쳐요. 한국 사람들은 모든 정보를 문장 안에 넣고 싶어해요. '안녕하세요. 저희 셋이 오늘 여기 첨 와봤는데요, 괜찮은 메뉴 있으면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하고 싶어하죠. 그걸 다 옮기려고 하니 말이 길고 딱딱해져요. 사실 '헤이, 왓츠 굿 히어(Hey, What's good here?)'라고 묻고 말 일이죠. 영어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고방식과 문화 차이이기도 해요.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한국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움직여요. 그렇지만 외국 사람 앞에선 그럴 필요 없어요' 또는 '지금 이게 고민이죠? 그 고민 좀 버려도 돼요. 그냥 하세요'라고요(웃음)."
지구에서 더 잘살려면
타일러는 미국 버몬트 특수목적명문고등학교 퍼트니 스쿨(Putney School)을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국제학을 전공했다. 버몬트주(州) 상원위원 사법위원장 사무실과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각각 인턴을 했고 서울대 외교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계, 어머니는 포르투갈계이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웹진 '서울리즘(Seoulism)'도 운영한다. 타일러는 "미국 사람 생각에 갇혀 이 지구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면 내게 또 다른 세상의 필터가 생길 것도 같았다. 동양의 나라를 찾았고, 그중 한국을 발견했다. 구글에 '북한'이라는 두 글자만 쳐봤는데 포로수용소나 인권 문제처럼 지금껏 내가 몰랐던 이야기가 수두룩했다. 그때부터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김영철은 반면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1남 2녀 중 막내다. 어릴 때부터 개그맨이 되고 싶었고 "얼굴 덕분에" 바로 붙었다. 26세에 개그맨 꿈을 이뤘다. 하춘화·양희은 성대모사 등을 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 무렵 슬럼프도 왔다. '개인기만 할 줄 아는 개그맨' 소리가 듣기 싫었다. 서수민 PD가 "넓게 보라"고 했다. 외국 코미디 페스티벌 축제를 다녔고 그때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김영철은 "전 세계 사람 다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외국 에이전시와 계약도 앞두고 있다. 한때 개인기에 연연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또 세계인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언어는 결국 도구일 뿐이라는 건가요.
타일러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외국어를 하나 익힐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겨요. 그 언어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죠. 제 꿈은 그 눈과 필터를 아주 많이 갖는 거예요. 그 눈과 필터가 아주 많아져서 어떤 나라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며 살고 싶어요. 결국 우리는 지구인이니까요."
김영철 "영어를 배우고서야 알았어요. 세상이 아주 넓고 어딜 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요. 한때 외국만 나가면 울렁증 생기고 땀 났지만 이젠 그렇지 않아요. 어딜 가도 부딪히면 그만이라는 걸 알죠. 사람들은 절 개인기 하고 싶어 안달 난 개그맨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전 소통을 꽤 잘해요. 라디오 하면서도 청취자 이름, 사연 다 기억하죠. 앞으로 전 세계 사람과 소통하며 살고 싶어요. 소통이 꿈이고 직업이고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눈을 크게 뜨고 굴리며) 근사하지 않아요? 나이 마흔 넘어서도 설렐 수 있는 건 배울 게 아직도 많아서일 거예요."
―배울 게 많아서 즐겁다?
타일러 "그럼요.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재밌죠."
김영철 "가끔 저도 공부하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럼 2003년 처음 공부할 때 찍었던 그때 그 사진들을 다시 봐요.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뭔가를 꾸준히 파고들며 산다는 것, 그게 기적 아녜요? 사는 건 결국 기적이에요."
김영철 프로필
1974 울산 출생
1999 KBS 14기 공채 개그맨 데뷔
2011 '뻔뻔한 영철영어' 출간
2013 '일단, 시작해' 출간
2016 SBS 라디오 '김영철의 파워FM' 진행
타일러 라시 프로필
1988 미국 버몬트 출생
2012 시카고대 국제학부 졸업
2014 '비정상회담' 출연
2017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석사 취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