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법원 정기 인사를 앞두고 법원행정처 출신의 지법부장급 판사들이 대거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행정처에서 근무 중이거나 과거에 일했던 지법부장급 판사 6~7명이 최근 대법원에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철을 앞두고 판사들이 옷을 벗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법원 내 엘리트로 평가받았던 행정처 출신 부장판사들이 한꺼번에 사표를 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법원 내부에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부장판사들이 법복(法服)을 벗는 것은 법원 전체적으로도 적지 않은 손해"라는 말이 나온다.

법조계에선 이런 현상이 최근 행정처 출신 판사들을 '적폐(積弊)'로 모는 법원 내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 초 법원행정처가 법관들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추진하던 '대법원장 인사권' 관련 세미나를 축소하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뒤부터 행정처는 법원 안팎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이어 김명수 대법원장이 작년 말 법원행정처에 판사 뒷조사 문건이 있다는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하라고 지시하자 일부 판사는 행정처를 향해 악담과 욕설을 퍼부었다. 일부 판사는 지난달 인터넷의 판사 전용 익명 게시판에 행정처 판사들을 향해 '개XX' '적폐 종자 따까리들'이라며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주로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판사들이 행정처 판사들을 집중 공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관 사회는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를 지지하는 판사들과 이를 반대하는 판사들로 갈라져 큰 갈등을 빚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행정처 출신 판사들이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사표를 던진 중요한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에 사의를 밝힌 행정처 출신 부장판사들 중 일부는 주변에 "행정처가 범죄 집단처럼 매도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 후 '행정처 개혁'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인사·예산·사법정책을 총괄한다. 행정처 심의관(평판사) 20여 명이 이 일을 한다. 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받는 사람은 판사 한 기수에서 10%도 안 돼 발탁 인사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행정처는 소수 인력으로 효율적인 사법행정을 담당해왔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사법부 관료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동시에 받았다. 이 와중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지난해부터 행정처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제기했고, 이 연구회 회장 출신인 김 대법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행정처 축소 및 개편 방침을 발표했다. 이후 법원 내부에선 "앞으로 행정처 출신은 인사 등에서 역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가 퍼졌다.

김 대법원장이 올해부터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를 폐지한 것도 한 원인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 대법원장은 고법부장 승진제 때문에 판사가 인사권을 쥔 윗선의 눈치를 본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인사를 이원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법 판사와 고법 판사 중 하나를 선택해 계속 근무하도록 해서 사실상 승진 개념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평판사→지방법원 부장판사→고법부장(차관급) 판사 순으로 승진하게 돼 있는 기존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고법 부장판사가 되지 못할 바에야 일찍 변호사로 개업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던 한 부장판사도 최근 대법원에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법 부장급 이상 고위 법관 중에선 강형주 서울중앙지법원장, 김정만 서울중앙지법 민사1 수석부장판사, 유해용·여미숙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4명이 사직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