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벗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 꺼풀 남았다. 마저 벗겨 내고 싶다만 혼자선 역부족이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온전한 전신(全身)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까닭이다. 결국 벌거벗은 사람만 누울 수 있다는 고무 침대에 엎드렸다. 가격은 1만5000원. 사각팬티를 입은, 팔뚝이 굵은 사내가 다가와 등을 살포시 두드린다. "총각, 때 처음 밀어요? 먼저 하늘을 보고 누워야지 이 사람아."
멋쩍어하며 몸을 뒤집자 민망해할 필요 없다며 얼굴과 다른 곳에 수건을 얹는다. 새해만 되면 무슨 바람이 부는지 앞뒤도 모르면서 때 미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번엔 다르리라 다짐하며 때 묻은 지난해를 벗겨 내러 온 이들일 것이다. 세신(洗身·때밀이)으로 새해를 맞는 건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 공교롭게 북한에서는 '해가 바뀌어 새해가 됨'을 세신(歲新)이라 부른다.
36년 동안 벗은 사람을 한 번 더 벗겨 온 세신사 김상섭(55)씨에게 잘 벗겨 내는 노하우를 물었다. "먼저 내 몸부터 깨끗해야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목욕하고 달마다 때를 민다고 한다. 이 세상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깨끗하다며 자랑한다. 다시 보니 피부가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하다. 타월 쥔 자부터 몸에 쌓인 때가 없어야 남의 몸의 적폐(積弊)도 씻어내기 당당한 법일 테다.
매일 샤워하기 때문에 나올 때가 별로 없을 거라 속으로 호언장담했지만, 곧 민망해졌다. 김씨는 "온종일 물과 함께 지내며 두 번씩 씻는 나도 때가 묻는다"며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을 벗으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르지 않더라"고 했다.
모두가 새로워지겠다고 다짐하지만, 지난해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새해다. 새로워지기 위해선 쌓인 때를 모두 벗겨 내야 하는 법인데 매번 실패한다. 어떡해야 마지막 한 꺼풀까지 모두 벗겨 낼 수 있을까. 세신을 업(業)으로 삼은 이들을 찾아 직접 그 방법을 물었다.
새해만 되면 전국에는 때 미느라 등 시뻘게진 아이들이 툴툴대는 소리가 가득하다. 부모는 아이를 달래려 노란 바나나우유 하나를 손에 쥐여준다. 보이지도, 닿지도 않는 등을 가족에게 밀게 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새해 의식은 부자·모녀 간의 정을 확인하는 과정이라서 소설이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됐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이 정서를 공유하는지 바나나우유를 만드는 업체 빙그레의 인사팀이 당황할 정도. 조용국 빙그레 홍보팀장은 “채용 시즌이면 ‘새해에 부모님과 같이 때 밀고 나와 바나나우유를 먹었던 추억’ 때문에 지원했다는 입사지원서가 쏟아져 2014년부터 아예 ‘지원 동기’ 적는 난을 없앴다”고 했다.
새해만 되면 허물을 벗겨 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독특한 문화는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회다. 지난 20일 오전 때밀이 기술을 가르치는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중앙목욕관리학원을 찾았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10여명의 수강생이 손에 수건을 말고 서 있었다. 20평 남짓한 공간이 북적였다. “새해가 되면 세신사를 필요로 하는 목욕탕이 급증하고, 덩달아 수강생 수도 가장 많아져요. 세신사 초봉이 최소 3000만원 이상은 보장된다는 얘기를 듣고 새 직업을 찾아온 이들이 대부분이에요.” 학원 관계자가 말했다.
하지만 자기 몸이든 남의 몸이든 때인 것 같다며 함부로 벅벅 긁어대다간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태반이다. 열받아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결국 따끔한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초록색 이태리 타월을 손에 두르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이들과 함께 상처 내지 않고 세신하는 방법을 배워봤다.
'쭉쭉' '쓱싹쓱싹'… 때밀이의 기본
세신 교육은 남녀 동성끼리 2인 1조로 짝을 이뤄 세신사와 손님 역할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한 20대 남성과 짝을 이뤄 고무 침대 옆에 섰다.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손에 수건을 마는 방법. 어설프게 밀다간 흉터 나기 십상이고, 연습인데 진짜로 때가 나오면 민망하니 수건으로 이태리 타월을 대신한다. 손에 수건을 칭칭 두르자 세신 경력 16년의 조모(54) 원장이 다가와 "그렇게 어설프게 말아선 5분도 안 가 풀릴 것이다"며 "타월 쥐는 것만 봐도 때밀이 실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세신사들은 일반인들이 쓰는 장갑 모양이 아닌 손에 돌돌 말아 쓰는 기다란 이태리 타월을 주로 사용하는데, 길이에 따라 장타월과 반타월로 나뉜다. 이태리 타월은 앞면은 부드럽고 뒷면은 까끌까끌하다. 가슴이나 배 등 살이 많고 굴곡진 부분은 부드러운 면으로 밀고 등과 같이 평평한 면은 거친 면으로 밀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긴 장타월은 손에 말았을 때 쉽게 빠지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앞뒤 면을 바꿔가며 밀기 어렵다. 반면 짧은 반타월은 손에서 쉽게 풀리지만, 앞뒤 면을 바꿔가며 몸을 밀기 쉽다.
때를 밀다 보면 “인간은 본성상 망각하는 동물이다”는 니체의 말을 새삼 깨닫는다. 밀었던 곳을 잊어버려 또 밀고, 결국 몇몇 군데는 민 것으로 착각해 지나가기 일쑤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순서를 정하는 것이다. 하늘을 보고 누운 이의 오른팔부터 시작해 목-가슴-배-허벅지-정강이-발 순으로 넘어가는 게 기본이다. 이 순서가 끝나면 물을 한 번 뿌린 뒤 왼쪽으로 넘어가 왼쪽 팔부터 다시 위 순서를 반복한다. 그다음 손님을 옆으로 눕게 해 밀고, 엎드리게 한 다음 등과 엉덩이를 비롯한 뒤쪽 신체를 민다.
때밀이 방법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학원에서는 이를 편의상 ‘1단계: 쭉쭉’ ‘2단계: 쓱싹쓱싹’ ‘3단계: 털어내기’라고 이름 붙였다. 팔 부분을 예로 들면, 손부터 어깨까지 한 번에 크게 크게 밀어내는 것을 ‘쭉쭉’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손에서 팔꿈치 부분까지 팔의 절반을 집중적으로 미는 것을 ‘쓱싹쓱싹’이라고 한다. 묻어 나온 때를 정리해 몸에서 털어 내는 것이 ‘털어내기’다. 이렇게 단계별로 나눠야 같은 곳을 또 미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리듬을 타며 밀 수 있어 힘이 덜 든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를 잘 잡아도 팔과 허리가 고된 것은 피할 수 없으니 ‘쭉쭉’ ‘쓱싹쓱싹’을 입으로 되뇌는 노동요가 학원에 가득 찼다. 자기가 자기 때를 밀 때도 기본이란다.
때를 놓치면 때 밀기 어렵다!
기본기를 익혔으니 이제 무림의 고수들을 직접 만나봐야 할 차례. 세신으로 유명한 서울시 송파구의 한 목욕탕을 찾았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신사 중 한 명인 김상섭(55)씨가 8명의 세신사와 함께 일하는 곳이다. 전성기 때 김씨는 연봉 3억원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 때 밀어 떼돈 번 것으로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김씨에게 세신 기술을 전수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김씨는 "부자가 되고 싶다며 찾아오는 20세 청년부터 번듯한 직장 다니다 그만두고 찾아온 40대 가장까지 거둬들인 제자만 100명이 넘는다"며 "때 미는 일이 별거겠느냐며 덤벼들었다가 의외로 어렵고 힘들어 그만두는 이도 많다"고 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0년 넘게 때밀이를 해온 현직자들에게 직접 배우며 비결을 전수받았다. 경력 10년 이상의 때밀이 고수가 아니라면 손목은 절대 쓰지 말라는 것이 중론. 일반 사람들은 손목 힘으로 때를 미는 경우가 많은데 빨리 힘에 부치고 손목 관절에도 큰 무리가 간다. 팔 전체 힘을 이용해서 미는 것이 좋다.
인생은 결국 타이밍인 것. 때를 놓치면 때 밀기 힘든 것도 같은 이유다. 몸을 불리는 시간은 15~20분이 가장 이상적이다. 열탕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으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때를 밀 때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손끝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야 때를 속속들이 빼낼 수 있는 것도 노하우다. 빳빳하게 손가락을 펴고 있으면 손바닥 일부에만 힘이 들어가 피부가 까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손가락을 살짝 오므려 손바닥 전체를 몸에 밀착한다.
다치지 않게 미는 것은 중요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유두나 복사뼈, 쇄골 등 몸의 돌출 된 부분은 특히 상처가 나기 쉽다. 타월의 부드러운 면으로 힘을 최대한 빼고 그 주변을 스쳐 지나가듯 미는 게 포인트다. 무심해 보이는 등도 사실은 상처가 많이 나는 부위. 등은 대개 거친 면으로 밀게 되는데, 적당히 판판하고 때가 잘 나와서 한없이 밀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잘 나갈 때 더 신중해야 하는 인생을 닯았다.
'때 돈' 벌러 모이는 사람들
대구에 사는 세신사 최경옥(52)씨는 1986년부터 공중목욕탕에서 부업으로 때밀이 일을 시작했다. 최씨는 “당시에는 ‘때밀이’나 ‘세신사’라는 호칭이 아니라 그냥 ‘아줌마’라고 불렸다”며 “지금은 때만 미는 이가 많지만, 예전엔 목욕탕에서 숙식하며 청소도 하고 매점 관리도 하며 때도 미는 목욕탕 직원에 가까웠다”고 했다. 세신사는 1993년이 돼서야 최초로 통계청 한국표준직업분류에 ‘욕실종사원’으로 분류됐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최씨처럼 때밀이 일을 하는 이들이 등장한 건 1970년대 즈음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산 ‘비스코스레이온’을 원단으로 한 이태리 타월이 생산되며 때 미는 문화가 정착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대중목욕탕이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나며 세신사도 등장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때를 자주 밀어 뽀얗고 보들보들한 피부는 ‘깨끗함’의 상징이었다. 특히 1970~80년대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때 검사’라고 불리는 위생검사가 학교에서 수시로 진행됐다. 때를 자주 벗겨 내는 문화가 깊게 뿌리박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며 피부과 의사들을 통해 때를 자주 미는 것이 오히려 피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때를 자주 미는 문화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 김범준 중앙대병원 피부과 교수는 “때를 밀면 떨어져야 할 각질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상피세포까지 제거해 피부의 유분이 사라져 건조해질 수 있다”며 “때를 세게 민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부에 묻은 노폐물을 제거하는 선 정도로 살살 미는 것이 좋다”고 했다. 2~3달에 한 번씩 피부의 노폐물과 모공에 쌓인 찌꺼기를 제거하는 정도로만 때를 미는 것이 좋단다.
때밀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며 덩달아 공중목욕탕의 수도 줄어든다. 1999년 전국 9868개였던 목욕탕의 수는 2014년 전국 6436개로 줄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1990년대 중반 처음 생긴 목욕관리사 양성 학원은 현재 전국적으로 30∼40곳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가정에서 수시로 때를 미는 문화가 사라지자 대신 2~3달에 한 번씩 세신사를 찾아 때밀이를 맡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신사들의 수입도 올라가고 있다. 초보자도 월 최소 250만원 이상을 벌고, 숙달되면 400만~500만원씩 번다고 한다. 대학 나온 20~30대 젊은 사람들까지 목욕관리사 학원에 북적이는 이유다.
“새해에 아버지와 때를 밀고 나와 바나나우유 먹었던 기분이 너무 좋아 목욕탕에서 일해 보고 싶었어요. 열심히 ‘때 돈’ 벌어 번듯한 목욕탕을 세우는 게 최종 목표예요.” 세신 기술을 배우며 만난 김민재(가명·27)씨의 꿈은 세신사 장인(匠人)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다. 고무 침대에 누워 있는 김씨의 허벅지를 두 번 두드리자 그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쭉쭉’ ‘쓱싹쓱싹’ 그의 팔을 힘차게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