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2013년 댓글사건에 대한 수사·재판을 방해(사법방해)한 의혹 관련 검찰 조사 일주일 뒤 사체로 발견된 고 정치호 변호사의 유족이 사망 원인 관련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고 정치호 변호사 유족협의회 변호인단은 24일 오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타살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충족되면 살인, 위계촉탁살인(청부살해), 자살교사·방조 등 혐의로 형사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고 정치호 변호사 유족협의회 변호인단이 24일 오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정원 감찰실 소속으로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에서 근무 중이던 정 변호사는 참고인 조사차 검찰 출석이 예정됐던 지난달 30일 밤 춘천 소양강댐 주차장에서 본인의 차량 안에 숨진 채 발견됐다. 검찰에 첫 출석한 같은 달 23일로부터 꼬박 1주일 뒤다.

그간 드러난 정황은 정 변호사의 사인을 자살로 추정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부검결과 정 변호사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차량 조수석에 태운 번개탄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국정원 관계자들의 전언이나 사망 전날 투신 시도도 자살 추정에 힘을 보탰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유족에게 정 변호사가 검찰 조사 사흘 뒤 ‘모든 책임을 다 내가 져야할 분위기가 되고 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했다고 전했다. 정 변호사는 사체로 발견되기 하루 전인 10월 29일 오전 강릉 주문진 신리천교 인근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해양기동대가 구조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유족 측은 그러나 정 변호사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했다. 우선 사체가 발견된 차량 내부 정황이 의문을 샀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할 경우 사망 직전 호흡 곤란 등으로 몸부림치기 마련인데도 정작 운전석 바로 옆에 뚜껑이 열린 채 놓인 소주병은 술이 가득 담겨 있는 점, 번개탄을 태운 흔적 등에 미뤄볼 때 자살로 위장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이렇다 할 지병이 없던 정 변호사를 부검한 결과 이례적으로 높게 나타난 혈중 칼륨농도(15mEq/l, 밀리에크바렌트)도 문제삼았다. 변호인단은 “대개 3.7~5.3mEq/l이 정상이며, 7mEq/l이상이면 심정지가 올 수 있다”면서 “칼륨은 안락사에 사용되는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유족 측은 타살 이후 자살로 위장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국정원은 주요사건에 휘말린 직원들이 2014~2015년 잇따라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시도하거나 사망한 전례가 있다.

무엇보다 유족은 정 변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동기가 없다면서, 사법방해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세력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변호인단은 “정 변호사는 1차 검찰 조사 때도 협조적으로 진술했고, 예정했던 2차 출석 때는 국정원의 댓글수사 방해 관련 자료를 제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정 변호사의 차량 트렁크에서 발견된 보자기 3개 가운데 2개에 가위로 잘린 흔적이 남았다. 통상 법조인들은 기록을 운반할 때 보자기를 쓰곤 한다. 변호인단은 “차량에서 검찰에 제출하려던 자료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보자기에 자료를 담아갔다가 사망현장에서 사라진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사고차량에서 정 변호사가 평소 사용하던 휴대전화가 일부만 발견된 정황도 제시했다. 정 변호사는 본인 명의로 개통한 휴대전화 2대 외에 평소 가족·친지 등과 통화할 때 쓰는 차명폰 등 총 3대의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고 한다. 변호인단은 차량에서는 정 변호사 명의로 개통된 휴대전화 1개만 발견됐을 뿐, 차명폰은 현재 종적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고 정치호 변호사의 유가족이 24일 정 변호사 사망 관련 진상조사 요구 기자회견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사체 발견 전날 정 변호사가 바다에 투신한 대목 역시 유족 측은 자살 기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변호사의 형은 “동생은 평소 수영을 잘했고, 수심 1.5m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 뒤에도 먼저 헤엄쳐서 교각을 붙들고 있다가 구조됐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오히려 “자살을 시도했다고 볼 수 없고 자살을 위장한 행동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간다”고 밝혔다. 유족은 ‘투신현장 주변에서 정 변호사가 무언가 찾으려는 듯 한 행동을 보였다’는 제보도 받았다고 한다.

유족 측은 사고 전후 국정원 및 수사기관의 대응 역시 매끄럽지 않다고 지적한다. 정 변호사의 형은 “(사체발견 당일) 국정원 직원과 만나 2시간 남짓 대화(검찰 조사 등 그간의 경위 관련)하다 헤어지고서 20여분 만에 동생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찰은 처음부터 현장 감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사건 발생 3주 만인 이달 21일에야 정밀 차량감식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