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 수트부터 후드 티셔츠까지, '루저 패션'이 뜬다
'평범하기 어려운' 청년 세대에게 추리닝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패션
잘 차려입은 옷은 촌스러워… 편하고 실질적인 것 추구하는 트렌드 반영
휠라, 카파, 엄브로… 90년대 복고 스포츠 브랜드, 트랙 수트 유행 주도

아디다스 스케이트보딩 x 헬라스 컬렉션

드라마와 영화에서 ‘추리닝’을 입은 사람은 줄곧 ‘루저’로 표현됐다. tvN ‘응답하라 1988’에서 7년째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정봉이’ 안재홍, tvN ‘혼술남녀’ 속 노량진 공시생 김기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동네 바보 김수현(사실 북한 공작원이었지만)까지, 시대가 바뀌어도 추리닝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들의 ‘시그니처 룩’으로 일관됐다.

그러나 촌스럽고 게으른 이미지를 상징하던 추리닝이 최신 패션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복고풍 운동복 스타일이 떠오르면서 90년대 스포츠 브랜드가 화려하게 부활하는가 하면, 인기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하이 패션으로 둔갑한다. 추리닝의 인기와 함께 복고풍 운동화와 슬리퍼의 주가도 덩달아 주가도 높아졌다.

◆ 백수 패션 ‘추리닝’, 하이 패션으로 부상하다

추리닝이라 불리는 트랙 수트(Tracksuit)는 지퍼가 달린 상의와 바지가 한 벌로 구성된 운동복을 뜻한다. 이름 그대로 처음엔 육상 선수들의 운동복으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트랙 수트가 대중에게 각인된 건 1970년대 이소룡이 미국 TV 드라마에서 입고 나오면서부터다. 1980년대에는 런 디엠시, 비스티 보이즈 등 힙합 그룹이 즐겨 입으면서 젊은이들의 에너지와 활력을 대변하는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몸의 곡선을 드러낸 트랙 수트를 착용하면서 유행을 잠식했다. 쥬시꾸띄르의 벨벳 트랙 수트가 대표적으로, 국내에서도 가수 이효리가 이 유행을 주도했다. 이후 트랙 수트는 트렌드에서 멀어지면서 아재 패션, 백수 패션으로 전락했다.

리복, 쥬시꾸띄르와 협업한 베트멍 2017 봄∙여름 컬렉션

트랙 수트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럭셔리 브랜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와 고샤 루브친스키는 몇 시즌에 걸쳐 트랙 수트를 선보이며 유행을 선도했다. 각각 그루지아와 러시아 출신인 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1990년대 ‘포스트 소비에트’ 시절, 불안한 청춘의 모습을 반영한 운동복 패션으로 현재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 ‘평범하기 어려운’ 청년 세대,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추리닝 패션에 열광

전문가들은 일상복과 스포츠 웨어의 경계를 허문 애슬레저 트렌드가 1990년대 복고풍 유행과 맞물려 트랙 수트가 주목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추한 옷차림으로 치부되던 트랙 수트의 인기를 단순히 스포티즘과 복고의 영향으로 단정 짓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미래의 희망인 청년들이 ‘추리닝 패션’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청년 백수 36만 시대, 현재의 젊은이들은 극심한 취업난으로 과거에는 기본이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5포, 7포를 넘어 N포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불안과 불황이 고착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취업하고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고, 집 한 채를 장만하는 삶은 평범보다는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트렌드 정보 그룹 PFIN의 이현주 이사는 “‘평범하게 살기도 힘든’ 현재의 청년 세대들은 실용적이고 일상적이고, 꾸밈없는 진실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이들은 가성비가 높은 실용적인 스타일이나 현실적인 패션에 열광한다. 트랙 수트는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아이템”이라고 설명했다.

허례허식이 빠진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요즘엔 잘 차려입는 것보다 신경 쓰지 않은 듯한 편한 옷차림이 더 세련된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맥락에서 트랙 수트는 편하고 신경쓰지 않는 멋스러운 패션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x 알렉산더왕 컬렉션은 뒤집어진 ‘트레포일’ 로고가 특징이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팝업 트럭’을 통해 발매해 화제를 모았다.

트랙 수트, 후디, 조깅 팬츠 등 '추리닝' 패션을 '하이 패션'으로 둔갑시킨 베트멍은 18개 브랜드와 함께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다. 2017년 봄여름 패션쇼에서는 리복, 쥬시꾸띄르의 트랙 수트를 재해석해 화제를 모았다.

알렉산더 왕도 아디다스와 트랙 수트 컬렉션을, 후드 바이 에어는 노스페이스의 로고를 패러디한 트랙 수트를 선보였다. 구찌는 호사스러운 장식으로 뒤덮인 꾸띄르 트랙 수트를 런웨이에 올렸고, 베르사체는 트랙 재킷 스타일의 드레스로 운동복 열풍에 동참했다.

힙합 뮤지션들도 트랙 수트 열풍에 불을 지피는 데 한몫 했다. 리한나는 자신이 디자이너로 나선 ‘펜티 × 푸마’ 컬렉션에서 트랙 수트를 드레시하게 변형했으며, 칸예 웨스트는 이지 컬렉션을 통해 스트리트 풍 트랙 수트를 선보였다. ‘칼라바사스(Calabasas)’ 로고가 새겨진 스웨트 셔츠와 트랙 팬츠, 모자, 운동화 등은 발매 5분 만에 완판 됐다.

고샤 루브친스키 2017 봄여름 컬렉션(왼쪽 2컷)과 2017 가을겨울 컬렉션(오른쪽 2컷)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지나치게 꾸민 옷차림이 오히려 촌스러워 보이는 시대다.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처럼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더 깊이 있고 전문가스러워 보인다. 트랙 수트의 인기는 편하고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추세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추리닝 패션’은 패션의 주류를 거스르는 안티-패션(Anti-fashion)의 흐름과도 연관이 있다. 통념에 벗어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탈을 즐기는 태도, 트랙 수트야 말로 자유분방함을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패션 아이템이다.

추억의 브랜드 카파, 휠라와 협업한 고샤 루브친스키 2017 봄∙여름 컬렉션

트랙 수트의 인기는 한 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스타일은 동네에서 입는 추리닝 같은 복고풍이 핵심이다. 특히 베트멍, 고샤 루브친스키 등을 통해 재조명된 휠라, 챔피언, 카파 등 1990년대 복고 스포츠 브랜드의 활약이 예상된다.

실제로 휠라는 FILA와 F박스 로고를 전면에 배치한 빅 로고 티셔츠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에는 일부 매장에서만 구매가 가능했지만, 10~20대 고객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올해 물량을 대폭 확대했다. 현재 휠라 의류 제품군 중 가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휠라 관계자는 “트랙 수트를 입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고객들에게 복고풍 로고 티셔츠가 좋은 대안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