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대선 때 새누리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낙인찍기였다. 이것 잘못했고 저것 잘못했고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이 한마디가 두 정권을 날려버리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다. 10년이 지나 그때의 피해자들이 '이명박근혜'라는 말을 들고 가해자가 되어 돌아왔다. 심지어 정치 보복 냄새 물씬 나는 적폐청산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겠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무한 복제되는 이 저주의 정치가 이번에도 끝날 것 같지 않다.
어제 여섯 차례 TV 토론이 모두 끝났다. 첫 토론회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이명박근혜' 할 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토론회가 거듭될수록 이 말을 사용하는 횟수도 늘고 대상도 확장됐다. 남북 관계나 경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일자리 문제를 얘기하다가 "이명박근혜 정부 책임 있지 않으냐"고 했다. 일자리 부족이 어디 갑자기 길거리에서 일어난 '형사 사건' 같은 것이던가. 수십 년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누적되고 축적된 결과 아닌가. 이러다간 미세 먼지도 이명박근혜 책임이 될 판이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만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덜 소모적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보수 정권 10년 됐으면 한번 바뀌는 것도 민주주의의 순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불화나 불통을 이미 잉태하고 있는 것이라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적(私的)으로 썼다는 것이 핵심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박 전 대통령 잘못이 크지만 그렇다고 박 전 대통령의 4년여 또 다른 분투의 시간, 그 정권에 복무했던 사람들의 시간과 열정, 거기에 쌓여 있을 것이 분명한 국가 운영의 지혜까지 모두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을 모두 무시해버리는 데서 불통은 시작되기 마련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20년'은 국가 시스템과 경제 체질, 무능력한 정치 전체에 대한 것이었지 누가 누구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잃어버린 10년'이나 '이명박근혜'에선 권력을 쥐기 위한 동물적 욕망만이 느껴질 뿐이다. 상대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이 상극(相剋)의 정치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불행을 겪고 난 이후에도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 다음 정권을 쥘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 말하는 '이명박근혜'는 상극 정치가 또다시 시작되려 한다는 신호탄 같은 것이다. 대통령 탄핵은 이렇게 또 다른 싸움 소재로 낭비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국가적 경험이다.
이제 투표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지긋지긋한 국정 혼란도 일단락되기를 바란다. 권력자가 없으니 경제가 더 잘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어떤 정권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새로 권력을 쥐는 자들이 권력을 쥐었던 자들과 그 시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정치를 하려 한다면 그런 권력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영속해야 할 국가와 국민을, 몇 년 후면 속절없이 사그라질 권력이 난도질하는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 일주일 후 대통령이 될 사람과 권력을 쥘 집단이 유념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