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직접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서비스를 디자인하는 '정부3.0 국민디자인단'이 2014년부터 활동 중이다. 이 활동은 매년 확대돼 작년에는 무려 382개의 국민디자인단이 전국 243개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활동했다. 국민디자인단 업무를 총괄하는 신승렬 행정자치부 국민참여정책과장은 "국민디자인단을 이해하려면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디자이너들은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펜이나 자, CAD 같은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현장에 나가서 고객과 이야기하고 관찰하는 것, 즉 과거에는 마케팅팀이나 개발팀이 했을 일이 디자인팀의 핵심 업무가 됐죠. 지난 2002년 100년 넘게 고수한 케첩병 디자인을 바꾼 하인즈(Heinz)사가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하인즈사 디자이너들은 고객과 대화하며 관찰한 결과, 상당수 고객이 케첩이 얼마 안 남으면 병을 뒤집어 보관하는 것을 알았어요. 이를 반영해 뚜껑을 아래쪽으로 옮기는 파격적 디자인을 선보여 큰 성공을 거뒀죠."
이처럼 디자인의 흐름이 현장과 소비자 시각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디자인 영역도 대폭 확장되고 있다. 최근엔 제품만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형태가 없는 서비스나 정책까지도 고객 눈높이에 맞춰 새로 디자인하는 서비스디자인이 핵심 트렌드로 떠올랐다. 이러한 트렌드를 정부 업무와 정책에 반영시켜 탄생한 것이 바로 '국민디자인단' 활동이다.
◇서비스디자인을 정부 정책에 적용한 '소금길 프로젝트'
2013년 정부3.0 업무를 총괄하던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 김성렬 창조정부조직실장(현 행정자치부 차관)과 윤종인 창조정부기획관(현 창조정부조직실장)은 손에 잡히는 성과를 창출해내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다. 민간 전문가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고객 관점에서 서비스를 새로 디자인한다'는 서비스 디자인 개념을 접한 이들은 의기투합해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범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그 시작은 서울 마포구 산동네인 염리동의 안전강화 사업(소금길 프로젝트)이었다. 서울시·한국디자인진흥원·디자인 전문회사와 함께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주민과 관광객을 골목길에 나오게 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한다는 취지로 진행됐다. 으슥한 골목길에 재미있는 조형물을 설치해 관광객이 찾아오게 하고, 운동시설을 만들어 주민이 밤에도 마실 나오게 한 것이다. 동네를 새 단장하자, 인근 대학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진 찍으러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늘어난 유동인구를 따라 독특한 개성을 가진 가게들까지 자리 잡으며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예상치 못한 효과까지 거뒀다. 소금길 사례가 입소문 나면서 지역별 국민디자인단 중 상당수가 이와 유사한 범죄 예방 디자인을 추진하고 있다.
2014년 31개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국민디자인단은 2015년에는 248개 팀으로, 2016년에는 243개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한 개 이상의 팀을 꾸리며 총 382개로 늘었다. 2016년 2월에는 세계 3대 디자인상인 iF 디자인 어워드가 처음 도입한 서비스디자인 분야에서 유일하게 금상을 획득,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관찰·대화로 국민의 '숨겨진 요구' 발견… 최적의 서비스디자인 제공
주목할 만한 국민디자인단 활동 사례로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진한 '마을 경로당 시설개선' 디자인단을 꼽을 수 있다. 서비스 디자이너, 일반 국민, 공무원으로 이뤄진 국민디자인단은 고객인 노인을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다가 예상 외 현실을 접했다. 다수 할머니가 집에 가지 않고 경로당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것. 국민디자인단이 이들과 며칠 동안 대화하며 찾아낸 이유는 '홀로 자다가 생길 수 있는 위기에 대한 공포'였다. 독거노인이 밤에 아플 때 도움을 청할 이가 없어 사망, 혹은 병세가 악화된 사례를 주변에서 듣거나 경험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찾아낸 할머니들의 숨겨진 요구사항은 '프라이버시'였다. 이들은 경로당에서 한 방에 모여 자면서 여러 가지 불편을 겪고 있었다. 국민디자인단은 할머니들의 이러한 요구사항을 반영, 최초 예산에서 목욕탕이나 급식시설 개선비를 줄여 접이식 칸막이를 구입했다. 이 칸막이를 낮에는 접어뒀다가 밤에 설치해서 개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국민디자인단을 포함, 대국민 서비스 개선을 총괄하는 장수완 공공서비스정책관(국장)은 "국민디자인단이 4년차를 맞았지만,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요란한 홍보보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는 경험, 즉 스토리두잉(storydoing· 상품이나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고 확산하는 데 고객을 직접 참여시키는 것)을 통해 성과를 널리 알리며 참여를 확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국민디자인단은 올해 주요 프로젝트를 선정, '스토리두잉 서포터즈'를 운영할 예정이다. 지원자 중 선발될 서포터즈는 각 프로젝트에 참여해 국민디자인단 활동이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발굴하고 이를 확산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 달 후면 차기 정부가 출범한다. 정부의 정책 기조는 바뀔 수 있겠지만 국민을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시키고, 이들의 아이디어와 요구를 반영한 서비스나 정책을 만들어내는 국민디자인단 활동은 정부의 정책 기조 변화와 무관하게 계속 확산할 것으로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