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러나 검찰과 법원은 '가족'으로 봤다.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이야기다.
롯데 그룹 경영 비리와 관련해 횡령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롯데그룹 총수 일가가 20일 차례로 법원에 출석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62)이었다. 신 회장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부장판사 김상동) 심리로 이날 오후 2시 열리는 첫 공판에 참석차, 오후 1시47분쯤 법원에 도착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재판정으로 들어갔다.
지난해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형제의 난’의 또 다른 주인공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63)은 3분 후쯤 동생을 이어 모습을 나타냈다. 기자들이 여러질문을 했으나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95)이 도착한 것은 2시 16분쯤이었다. 빨간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휠체어로 갈아탄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으흠”하는 신음소리만 냈다고 한다.
3부자보다 더 많은 플래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수십년만에 모습을 나타낸 서미경(57)씨였다. 오후 1시32분쯤에는 다른 롯데가 사람들보다 먼저 나타난 서미경씨는 ‘검찰조사에 왜 매번 불출석했느냐’는 질문에 거의 답을 하지 않았다. 서미경 씨는 그간 검찰 및 법원의 수차례 통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머물며 불출석했고, 결국 법무부가 ‘여권무효화 조치’를 내려 임시여권으로 입국했다.
서미경씨는 '신격호 회장의 셋째 부인'으로 불린다.
서미경씨 나이는 57세로, 씨는 신동주 부회장보다는 여섯살, 신동빈 회장보다는 다섯살이 적다. 당연히 서씨는 신동주·동빈씨와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두 신씨의 모친은 90세인 일본인 여성 시게미쓰 하츠코씨다. 신격호 회장은 시세미쓰 씨와 지금도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법과 일본법은 모두 '중혼'을 금하고 있다. 서미경씨는 신격호 회장과는 법적으로 어떤 관계로 형성되지 않았고, 서미경 씨의 딸만이 신격호 전 회장의 친자로 인정받은 상태다.
따라서 서미경씨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신격호 회장의 셋째부인’이 아니라 ‘첩(妾)’, 소실(小室) 혹은 ‘작은 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실제로 신격호 전 회장이 서씨, 그 딸과 오래 생활해왔으므로, ‘사실혼 관계 여성’이라고 부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우리 언론은 ‘셋째 부인’이라는 칭호로 서씨를 대우하고 있다. 신 회장의 본처가 일본이기 때문에 한국인 여성을 그런 단어로 부르는 게 껄끄러워서였을까. 아니면 한 때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미스 롯데 서미경’에 대한 ‘호의’가 작용한 것일까.
서씨의 혐의는 몇가지가 된다. 2006년 신격호 총괄회장이 차명 보유하고 있던 일본 롯데홀딩스 주식 1.6%를 차명으로 넘겨받으면서 증여세 298억 원을 내지 않은 혐의, 딸 신유미 씨(34)와 공동으로 롯데 측에서 ‘공짜 급여’ 508억 원을 받은 혐의, 롯데시네마 매점 운영권을 헐값에 넘겨받아 770억 원을 번 혐의 등이다. 서씨에게 이런 특혜를 제공한 롯데그룹도 당연은 서씨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 같은 부당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일이 한두해에 걸쳐 벌어진 것은 아니다. 롯데 직원들은 어떤 ‘근거’로 이런 부당지원을 서씨 모녀에게 할 수 있었을까. ‘회장님의 여자니까’ 라는 이유 외엔 설명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롯데그룹 비리는 결국 롯데 총수 일가의 가족 비리다. “영웅이 여러 여자 품는 것은 당연하다”는 수십년전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신격호 회장의 모습은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국민 대다수에게 이들 ‘가족’의 모습은 매우 기이하게 느껴진다. 가족경영이 비난 받는 건, 이런 경우들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격호 회장은 이날 법정에서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세운 회사, 내가 100% 주식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기소할 수 있느냐” 성공한 사람도, 도덕성이 낮은 경우가 있다. 구태 경영의 여러 층위를 이들 가족이 보여준다.
법적으로 ‘가족’ 구성원이 아닌 신격호-서미경-신동주-신동빈이지만, 법원은 ‘실제적 가족’을 한꺼번에 불러들였다. 한 번도 상면한 적이 없다는 이들 네 사람이 법원 ‘배려’로 가족사진이라도 찍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