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지난해 5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나는 환자, 그는 간호사였다. 그가 나를 맡은 적은 없으니, 만났다기보다는 나 혼자 지켜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병원에 왔는지는 모른다. 말 그대로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며칠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회사 로비에서 쓰러진 나를, 동료들이 응급조치했고, 5분도 안 돼 119 구급차가 달려왔다는 것이다. 곧바로 수술했고, 의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나를 이편으로 끌어당겼다. 직장 동료들, 얼굴도 못 본 구급대원들, 그리고 의료진이 정말 고맙다.
눈을 뜬 순간, 몹시 두렵고 당혹스러웠다. 양손은 묶여 있고, 침대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었다. 중환자실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김명민이 '하얀 거탑'에서 수술하며 무덤덤하게 내뱉던 '석션'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줄 몰랐다. 가래는 왜 그리 자주 차는지, 수시로 했던 석션은 짧지만 강렬한 고문이었다. 코로 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코로 먹는 물이 시원한 줄 처음 알았다. 어느새 밥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간호사가 밥만 주면 반드시 물을 요구했다. 심장이 멎으면 다른 장기도 타격을 입는다. 췌장 손상을 이유로 코로 먹는 밥과 물마저 끊기자, 식탐은 더 강해졌다. 치렁치렁 몸 곳곳에 연결된 줄들은 그 자체가 감옥이었다. 무엇보다 잠들기가 힘들었다. 바깥에서는 늘 잠이 모자랐는데, 여기서는 시간은 지천인데도 하루 4시간 자기도 어려웠다. 초점 없는 시선만 던질 때, 간호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남자 간호사구나' 하고 말았는데, 잠들지 못하는 나는 밤새 그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환자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주사를 놓고, 수액을 조절하고, 채혈하고, 기록했다. 자정 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새벽 2시가 지나고 4시가 지나도 몸짓이 느려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속도가 붙는 듯했다. 아침이 밝아 오고, 교대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라스트 스퍼트라도 하듯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낮과 밤 구분이 없는 병원이라지만, 응급 상황도 아니고 환자도 잠드는 야간에, 꼬박 9시간을 왜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지 첫날은 이해하지 못했다.
누워서 할 수 있는 것은 병원 풍경 관찰자가 되는 일이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호기심으로 관찰했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도 시행 전에 환자에게 일일이 설명했다. 욕창이 생길까, 환자 몸을 정성스레 닦았다. 바닥에 떨어진 솜을 줍고, 아침에는 식판도 날랐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맡지 않은 환자와도 눈을 맞추고, 손짓하거나 부르면 달려가 주었다. 간호사 한 명이 담당하는 환자가 많아서 '남의 환자'까지 돌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응급상황이 아니면 잘 돌보지 않는다. 남의 환자와는 눈을 맞추지 않고, 불러도 듣지 못한 체하기도 한다. 남의 환자까지 보살피려니 그는 항상 시간이 모자랐고, 주간 근무든 야간 근무든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의사는 "1주일 안에 걸어나가게 하겠다"고 장담했었다. 결과적으로 1주일은 좀 과장이었지만, 호흡기를 떼고, 말하는 자유를 얻고, 혼자 일어서고, 입으로 밥을 먹기까지 과정은 제법 신속히 진행됐다. 까닭 모르게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해 분노와 원망으로 얼룩진 마음은 이 헌신적인 박병규 간호사를 보며 반성하고 감사하고 새 각오를 다지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숭고한 직업윤리와 소명 의식을 보았고, 열 살 남짓 어려 보이는 청년인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의사지만, 고비를 넘긴 환자가 심리적 안정을 찾고, 얼마나 빨리 회복되는가는 간호사에게 달렸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일으켜준 천사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