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 국내 최대 민족운동단체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1월 19일 민족운동가 34명을 발기인으로 첫 모습을 드러냈다. 발기인에는 조선일보의 이상재 사장 등 핵심 간부들과 조만식(개신교), 한용운(불교), 권동진(천도교), 김명동(유교) 등 종교계 인사, 조병옥(연희전문 교수), 홍명희(오산학교 교장) 등 교육계 인사, 김준연·한위건 등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포함됐다. 당초 정했던 이름은 신한회(新韓會)였는데 일제 당국이 승인하지 않아 신간회로 바꾸었다.

발기인 모임에서 발표된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이라는 강령은 신간회의 출범 배경과 활동 방향을 보여주었다. 신간회는 1920년대 중반 국내 민족주의 세력 일부에서 대두했던 자치론(自治論)에 자극받아 시작됐다. 일제의 회유에 타협하려는 움직임을 위험하게 본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계급과 이념을 넘어선 민족 단일당을 만들어 대응하려고 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회주의자들이 호응함으로써 항일민족통일전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간회 창립 1주년을 맞은 1928년 2월 15일 신간회 신의주 지회 인사들의 모습. 뒤쪽 벽에 신간회 강령이 붙어 있다.

1927년 2월 15일 창립총회에서 이상재를 회장, 권동진을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출범한 신간회는 민족의 전폭적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 각지에서 청년·노동·농민단체가 주도하는 지회가 속속 만들어져 그해 말 지회 100개 돌파 기념식을 가졌다.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1929년 초에는 전국에 149개의 지회를 두었고 회원이 4만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지회는 순회강연과 야학 등을 통해 조선인 착취 기관 배격,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조선인 본위 교육제도 실시, 만주 동포 지원 등 우리 민족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신간회가 예상을 넘어 폭발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견제를 시작해 전체 대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신간회는 1929년 6월 말 몇 개의 지회가 합동으로 선출한 대표들이 모여 복(複)대표대회를 열고 변호사 허헌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지회에서 영향력이 컸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때 상당수 본부 간부로 진출했다. 체제를 정비한 신간회는 얼마 뒤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개입했다.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종교·청년·노동계와 함께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지만 일제가 간부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1930년 1월 변호사 김병로가 집행위원장 대리로 신간회를 이끌게 된 후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공황 발생과 일본의 만주 침략 등 정세가 바뀌었기 때문에 신간회 대신에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투쟁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국제공산주의 지도부가 반제(反帝) 연합전선 노선을 포기하고 신간회를 '민족 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한 데 영향받은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를 강력 반대했지만 1931년 5월 15일 창립 이후 처음 열린 전체대회에서 해소안(案)이 통과됐다.

신간회는 일제 치하 국내 민족운동사 연구에서 3·1운동 다음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신간회 운동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지만 좌·우파의 민족연합전선이었던 신간회가 분단 극복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도 관심을 증대시켰다.

1980년대 이후 좌파 민중사관의 대두는 신간회 연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사회주의 단체와 공산주의 조직의 통일전선에 대한 입장 변화와 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코민테른의 노선 전환이 집중 조명됐다. 이런 연구 경향은 신간회 평가에도 반영됐다. 종래 민족운동 분열로 비판받던 신간회 해소가 동력을 상실한 조직 대신 더 발전한 새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로 재인식됐다.

최근 들어 이런 접근이 사회주의와 국제 요인에 너무 치중해 신간회 운동에 대한 이해를 왜곡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정세 변화에 연동돼 일제 당국의 통치 방침이 전환되고 민족주의 세력의 이에 대한 대응이 분화되면서 신간회가 출범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좌우 합작을 너무 강조할 것이 아니라 민족운동이 발전하는 연속선상에서 신간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