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연습 하랴 강의하랴 맨날 애들하고 소리 지르니 철이 안 들어요. 서른다섯 살이면 나가는 극단 단원들처럼 나도 그 나이쯤에 멈춰 있는 것 같아요."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77)이 데뷔 50년을 맞았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웨딩드레스'가 당선돼 등단한 그는 공상 많은 소년 같았다. 바리캉으로 직접 민 스포츠 머리에 후드 티를 입고 "젊었을 땐 오십 살까지 살까, 했는데 데뷔 오십 년이라니"라며 웃었다.

"신춘문예 뽑히곤 큰 작가나 된 줄 알고 방방 뛰었지. 대학 졸업하고 3~4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떠돌던 때라서 세상이 내 품에 들어온 것 같았죠. 어떤 씨앗 역할을 해줘서 다음 작품을 또 쓰게 만들었어요."

서울 남산예술센터 분장실에서 만난 오태석은 “연극은 모자라는 나를 목격해야 하는 고해성사”라며 “배우와 제작진이 40%를 만들고 나머지 60%는 그날그날 관객이 보태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약 70편을 썼고, 1984년에는 극단 목화를 창단했다. 오태석은 "단어와 단어의 배치가 어떤 맛을 내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문어체와 구어체는 조상이 다르다시피 해요. 번역극이 대세이던 시절에 나는 되도록 구어체나 사투리를 썼어요. '사랑한다'를 '아휴 이 썩을 ×아'로 바꾸는 식이지. 들일하면서 부르는 노래 같은 우스개 덩어리, 무대에서만이라도 그런 말들을 널어놓고 싶었어요."

연극 인생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물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까지라면 나는 글쎄, 생물학적 나이론 삼랑진(경남 밀양)쯤엔 닿아야 정상인데 작업으로는 김천, 절반밖에 못 왔다"며 몸을 낮췄다. 20~30명 되는 '식구(단원)'들이 현실과 마주치지 않고 허구(연극) 속에 머물게 하려면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매일 오후 1시에 전부 불러모아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 붙잡고 연습시켜요. 그래야 한눈팔 겨를이 없으니까."

오는 24일부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연극 '도토리'를 공연한다. 지적 장애로 자신은 보호하지 못하면서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일렬이와 삼렬이가 주인공이다. 오태석은 "남의 것을 하찮게 보고 빼앗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이야기"라고 했다. "옛날 산에는 도토리가 널려 있었어요. 멧돼지는 도토리를 먹고 여기저기 배설하며 참나무를 심는 셈입니다. 너나없이 도토리를 주워가는 바람에 이젠 멧돼지가 농가로 도시로 내려와요."

목화를 거쳐 간 배우는 100명쯤 된다. 조상건, 박영규, 김일우, 정진각, 정원중, 한명구, 손병호, 김병옥, 정은표, 성지루, 박희순, 임원희, 황정민(여), 장영남, 유해진…. 영화·드라마에서 활약하는 '오태석 사단'은 믿음직스럽다. 오태석은 "무대예술은 육상으로 치면 장거리, 마라톤"이라며 "배우는 자신이 무지개 중 어느 빛깔에 해당한다는 걸 깨달으면 어디에 가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대표작으론 1976년 초연한 '춘풍의 처'를 꼽았다. 고전 소설 '이춘풍전'을 재해석하며 탈춤과 꼭두각시놀음으로 전통의 맛을 살린 연극이다. 오태석은 "앞으로는 남들이 대단하다고 할 만할 작품을 쓰고 싶다"며 "흩어진 걸 모아서 응답해야 할 시기"라고 했다. 자신의 무대 방법론을 따라오며 익히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 지난 50년간 가장 고마운 사람을 캐묻자 이렇게 답했다.

"우리 단원들이죠. 어떤 조건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시대잖아요. 연극이라는 게 막막한 벌판인데 안 도망가니까, 허수아비처럼 견디고 서 있는 그 친구들이 고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