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이례적으로 자신의 '능력 부족'을 언급했다. 그는 이날 오후 12시 30분(북한 시각 정오) 조선중앙TV를 통해 방송된 육성 신년사 말미에 "우리 인민을 어떻게 하면 신성히 더 높이 떠받들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며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했다. 수령이 신격화되고 '수령 무(無)오류성'이 지배하는 북한에서 '수령' 스스로 공개 석상에서 능력 부족을 자인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충복 되겠다"며 애민주의 부각
김정은은 또 "전체 인민이 '세상에 부럼없어라' 노래를 부르던 시대가 지나간 역사 속의 순간이 아닌 오늘의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 헌신분투할 것"이라며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엄숙히 맹약한다"고 했다. 자신이 집권한 지금보다 김일성 시절이 좋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통일부는 분석 자료를 통해 "성과 부진에 대한 비난을 회피하고 '인민 중시'를 김정은 시대 브랜드로 만들어 대중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는 의도"라고 풀이했다. 김승 전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도 "애민(愛民)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것"이라며 "경제 강국 건설 실패에 따른 비난을 희석하려 했다"고 했다.
한국의 '촛불 시위'에 위기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국대 김용현 교수는 "최순실 사태를 통해 성난 민심이 정권을 붕괴시킨다는 교훈을 얻은 듯하다"고 했다. 일각에선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이 '올해는 김정은 우상화가 더욱 심해질 것'이란 전망을 내놓자 일부러 '낮은 자세'를 보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야당에 정권 넘어가는 것 전제로 얘기한 듯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한국 정치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던 금기를 깨고 '탄핵·촛불 정국'을 거론했다. 그는 "지난해 (남한의) '전민(全民) 항쟁'은 보수 당국에 대한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라고 했다. 또 "박근혜와 같은 반통일 사대 매국 세력의 준동을 분쇄하기 위한 전민족적 투쟁을 힘 있게 벌여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이 박 대통령의 실명을 언급한 것 역시 처음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박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가 확정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김정은은 "올해는 10·4 선언 발표 10돌이 되는 해"라며 "온 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파국 상태의 현 북남 관계를 수수방관한다면 그 어느 정치인도 민심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결국 박근혜 정부의 뒤를 이을 차기 한국 정권을 향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한국의 대선을 의식해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며 "북에 유리한 정권이 들어서도록 보수 대 진보 간 남남(南南) 갈등을 유발하며 위장 평화 공세를 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최고위급 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2015년), "누구와도 마주앉아 민족 문제·통일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것"(2016년) 등 과거 신년사에 비해 대남 제안의 구체성은 떨어졌다.
미국을 향해서는 "시대착오적인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을 겨냥한 'ICBM 카드'로 "우리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으면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트럼프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모습은 피한 것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마무리 단계"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로켓(미사일·ICBM) 시험 발사 준비 사업이 마감 단계"라며 "미국과 그 추종 세력들이 전쟁 연습 소동을 걷어치우지 않는 한 핵 무력을 중추로 하는 선제공격 능력을 계속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신년사에서 ICBM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과거에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해 이를 '인공위성 개발'로 포장했는데, 이제는 보란듯이 ICBM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북한은 이르면 김정은 생일(1월 8일) 또는 미 트럼프 행정부 출범(1월 20일) 전에 장거리로켓을 발사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