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 쓴 글을 좋아한다. 박찬욱,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우디 앨런의 글을 좋아한다. 본업에서 벗어난 글쓰기가 맥주 회사에서 만드는 우롱차나 녹차의 느낌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감독들의 글을 찾아 읽는 기쁨이 굉장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를 읽었다. 어쩐지 책 제목도 그답다는 생각이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잘 알 것 같단 느낌을 받는다. 불현듯 다가가 "당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느낌이에요" 같은 말을 하면 수작이나 거는 한심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역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영화에서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가 늘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그린다는 게 잔상처럼 남는다. 더구나 떠나간 사람을 단죄하거나 남겨진 사람을 쉽게 연민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건 더더욱. 이 책을 읽던 날, 이 문장을 발견했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원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인간에게 나약함이 필요하다'라거나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같은 말은 자존감 높아야 하고 우리는 홀로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자기계발적 시대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미칠 듯한 효용성의 시대에 결핍은 단점이 될 수 있고, 나약함은 경쟁에서의 도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불완전성, 인간의 불완전함은 일종의 '판단정지' 상태를 만든다. 잠시 멈춰 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다.
'걷는 듯 천천히'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다양한 영화가 등장한다.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 때문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기 위해 죽은 형의 그림자에 갇힌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걸어도 걸어도', 엄마의 가출 이후 남겨진 아이들의 비극을 담담히 그린 '아무도 모른다', 헤어진 엄마 아빠와 모여 꿈을 가진 아이들이 기적을 상상하며 떠난 여행을 그린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까지. 그는 영화에 대한 소소한 글과 다양한 배우와의 에피소드, 다큐멘터리 감독 시절에 겪었던 일화들까지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병원에서 아이가 뒤바뀐다'는 선정적 사건을 플롯에 넣으면 관객의 시선과 의식은 아마 '부부가 어느 아이를 선택할까?'라는 질문 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 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야기보다 인간이 중요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사건'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것을 조금 더 상세히 알게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같은 영화가 세 살이었던 딸이 열 살이 되었을 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든 영화라는 것도 말이다.
그는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사실을 딸에게 말을 걸듯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흩어진 산문을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입체적으로 쌓인다는 것이다. 가령 나 역시 좋아하는 배우인 '기키 기린'에 대한 감독의 기억이 그렇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는 주인공과 가고시마에서 함께 사는 외할머니 역을 부탁했다. 크랭크인 전날, 기린씨에게 이끌려 초밥을 먹으러 갔다. 자리에 앉자 그답지 않게 각본을 탁자 위에 펼친다. 나는 자세를 좀 바로잡았다. '감독도 알겠지만… 어른 장면이 좀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 어른은 배경이니까. 다들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클로즈업 촬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책을 읽으면 관객의 입장에서 '아, 역시 그 배우에겐 대단한 통찰력이 있었어!' 같은 생각을 하며 뭔가 더 즐거워진다. 영화를 한 번 더 보면서 그 배우의 연기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할까.
즐겁게 책을 읽다가 '상중에'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하고는, 코끝이 찡해졌다. 정신과 의사인 노다 마사아키의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유족들의 정신적 치료에 대한 논픽션이라고 했다.
"이 책이 특별히 마음을 울린 데는 이유가 있다. 책이 출간되기 반년 전쯤,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종합학습'을 하던 나가노현의 한 초등학교를 3년에 걸쳐 취재했었다. 이나 초등학교 봄반, 이 학급의 아이들은 목장에서 빌린 송아지 한 마리를 키워 교배를 시키고 젖을 짠다는 목표를 세우고 3학년 때부터 계속해서 송아지를 돌봐왔다. 그러나 5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예정일보다 한 달 빨리 어미소가 조산해버렸고, 선생님들이 이를 발견했을 때 아기 송아지는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울면서 송아지의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은, 염원했던 젖 짜기였다. 사산을 했어도 어미소의 젖은 매일 짜줘야만 했다. 학생들은 짠 젖을 급식 시간에 데워 마셨다. 즐거웠어야 할 이 젖 짜기와 급식은 본래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다."
그는 비극을 겪어낸 봄반 아이들이 쓴 시를 책에 소개한다. "쟈쟈쟈/ 기분 좋은 소릴 내며/ 오늘도 젖을 짠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인간의 성장이란 무엇일까. 기분은 좋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다단한 감정이 성장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그는 반문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걷는 듯 천천히―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