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열 산업1부 차장

1986년 어느 날 부산의 한 대학에서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특별 강연을 했다. 노사 갈등이 불거지던 시절이었다. 보좌진은 "가능하면 학생들과 마찰도 우려되니 강연을 연기하자"고 건의했지만 정 회장은 강행했다.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은 "한국 재벌들의 성장 배경에는 정권과의 유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회장님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질문했다. 정 회장의 답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솔직히 한국에서 정경 유착을 하지 않고 기업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내가 불확실성이 도사린 중동 진출을 하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국내에서 정당하게 공사를 따내도 걸핏하면 정경 유착이라고 수군대는 것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돈 벌어 실력을 입증받고 싶었다." 정주영 회장은 회고록에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특히 기업을 이끌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정권 교체 때마다 겪어야 했던 수난이었는데, 국민은 실상도 잘 모르면서 권력이 기업을 때리기만 하면 무조건 좋아했다는 섭섭함도 곳곳에 기록돼 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 데는 이런 이유가 가장 컸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난 6일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장에서 정경 유착 논란이 또다시 벌어졌다. 대기업들이 최순실씨가 주도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금으로 774억원을 내고, 무언가 대가를 원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6일 오후 허창수 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6명의 재벌총수들이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제1차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경식 CJ 대표이사, 구본무 LG 대표이사,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 대표이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이번 청문회를 두고 평가는 엇갈린다. 글로벌 기업의 총수들을 불러내 최순실 국정 농단의 핵심은 하나도 밝혀내지 못한 채 호통만 치다 보니 기업들의 브랜드 이미지만 깎아내렸다는 평가가 있다. 또 한편에서는 '한국적 정경 유착'의 사슬을 끊고 이참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 역시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청문회 말미에 "구태를 다 버리고 정경 유착이 있었으면 다 끊겠다"고 얘기한 것은 그런 차원에서 소득이다.

하지만 정경 유착의 단절은 선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실행이다. 이번 재단 출연 건과 관련해 대가성이 드러나지 않은 LG도 두 재단에 78억원을 냈다. 왜일까. 청문회장에서 구본무 LG 회장은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어느 의원이 "앞으로도 정부에서 돈을 내라고 하면 (돈을 낸 뒤) 이런 자리에 또 나올 것인가"라고 추궁하자 구 회장은 "국회가 입법을 해서 막아 달라"고 했다.

기자는 여기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 스스로 정경 유착을 불가능케 하는 법과 환경을 만들었으면 한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정부나 정치권이 제안하고 주도하는 재단에 기업들이 기부금을 내는 것은 엄격히 제한하는 규정 같은 것 말이다. 때만 되면 정부가 기업으로부터 수십억, 수백억원씩 갹출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 현실에서 '정경 유착 논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