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문화부 차장

"네 살 아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다가 'fail'이 뜨자 좋아했다. 의아해진 아버지가 묻는다. 'fail이 무슨 뜻인지 아니?' '응, 아빠. 실패라는 뜻이잖아.' '그러면 실패가 무슨 뜻인지는 아니?' '그럼, 아빠. 다시 하라는 거잖아'"(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중에서)

무너지는 국정(國政)을 보며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선택했던 사람들의 상실감과 배신감이 더 크겠지만, 지지하지 않은 사람도 유쾌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는 것은 우리의 대한민국 품격이니까.

예고 없이 열린 29일의 박 대통령 제3차 대국민 담화는 4차 담화가 곧 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켰다. 자신의 임기 단축에 대한 공을 또 국회로 넘겨버렸고, 기자가 질문하는 도중 다음에 보자며 퇴장했다. 정작 주재해야 할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 회의에는 40일째 부재중. 국정 역사 교과서는 나오자마자 식물 교과서 위기에 처했고, 교육부 장관은 주머니에 사표를 넣어 다닌다는 얘기까지 있다. 법무장관의 사표가 수리되고 민정수석 사표는 보류됐다지만, 모양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심야 귀갓길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중년 여성이었다. 경북 출신으로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찍었다는 그는 차라리 대통령이 인형이 아니라 몸통이었다면 덜 창피했을 것 같다며 푸념했다. 야당은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 게이트'라고 불러야 한다는데, 차라리 그렇다면 덜 부끄럽겠다고 했다. 택시 기사의 '무례' 여부나 실체적 진실과 상관없이 평범한 국민이 느끼는 자괴감이 바로 이 대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기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3차 대국민담화의 내용은?]

박근혜 정부는 실패했다. 그를 찍은 유권자도 남 탓할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실패'를 자포자기와 동의어로 만들어선 안 될 일. 실패를 인정했을 때 다시 하지 않는다면 앞의 네 살배기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책 담당 기자가 이번 주 읽은 신작 소설 중에 30대 작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 있다. 주 100시간 격무에 지친 레지던트 후배 의사를 70대 원로 의사가 위로하는 대목이 나온다. "힘들지요. 많이 바쁘지요." 청년 의사가 대답한다. "아니요. 그것보다는 늘 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어렵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 때문에 별명이 '슈크림'인 노의사는 우리가 하는 일들을 돌 던지기에 비유한다. 왜 아무리 던져도 제자리일까 속상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청년 세대는 4·19 세대를 비롯한 각 세대가 던진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새로 시작했다는 것.

물론 가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반대쪽으로 돌을 던질 때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광복 이후 지난 70년간의 릴레이 던지기로 대한민국은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랑해도 좋은 역사다. 그리고 명심할 사실 하나 더. 우리 또한 이 거대한 릴레이의 징검다리라는 것. 돌은 이제 앞으로 던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