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수제화 작업실에는 자동화 기계가 한 대도 없다. 작업대 위엔 망치와 집게, 주걱처럼 생긴 구두칼과 숫돌 정도만 올려져 있었다. 임명형(오른쪽) 대표는 “망치와 칼만으로도 신발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아들 승용씨도 아버지를 따라 집게를 쥐었다.

서울 지하철 을지로3가 역에서 나와 청계천 쪽으로 걷다 보면 빛바랜 '수제화의 명문' 간판이 걸린 4층짜리 건물이 나온다. 건물 복도와 계단은 폭이 1m가 채 안 되게 좁았다. 건물 외벽 흰색 타일 틈에도 먼지가 끼어 있었다. 지난 23일 오후 이 건물 3층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구두 수십 켤레가 놓여 있는 진열대 사이에서 임명형(52) 대표가 일어났다. 올해 80주년을 맞은 '송림수제화' 주인이다. 그의 시선이 잠깐 방문객의 발을 향하더니 얼굴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송림수제화는 1936년 문을 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신발 가게다. 같은 자리에서 80년간 구두를 만들어 팔고 있다. 1980년대 현재의 건물이 들어서기 전엔 단층 판잣집이었다. 지금은 건물 3층 51㎡(약 15평) 공간을 판매점, 4층을 작업장으로 각각 임차해 쓴다. 송림수제화는 1950년 우리나라 최초로 등산화를 만든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88올림픽 때 사격 선수들이 신는 사격화를 만들었고, 1995년엔 탐험가 허영호씨가 이곳에서 만든 신발을 신고 남극과 북극을 횡단했다.

이곳에선 구두와 등산화, 장애인화 등을 판매한다. 산악인들 사이에서 송림수제화 등산화는 명품으로 꼽힌다. 40만~70만원 안팎 고가이지만 신발을 손님 발에 딱 맞게 제작하기 때문이다. 최고급 소재를 쓴다는 이 집 신발은 한 켤레를 짧게는 20년, 대개 30~50년을 신는다고 한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김영삼 전 대통령, 조순 전 서울시장 등 유명 인사와 정치인 단골도 많다.

산악인 허영호씨는 고교 때부터 송림수제화 단골이다. 허씨가 지난 4월 5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을 때 신었던 송림의 등산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가게

―제 발부터 보시던데요.

"여기서 일한 지 30년 됐으니 일종의 직업병이랄까요. 저 문으로 들어오면 맨 먼저 발부터 보여요. 걷는 모양이나 발걸음만 봐도 알아요. 발가락이 불편한지 발등이 불편한지 보이는 거죠."

―발 불편한 사람이 많나요?

"10명 중 7명은 기성화를 신어도 별 불편함 없는 사람들이에요. 나머지 3명 중 2명은 '그래 좀 불편하지만 참고 신자' 하는 사람들이고요. 문제는 나머지 1명이지요. 이 사람들은 시중에 나와 있는 신발은 뭘 신어도 불편해요. 발 불편하다고 병원에 가도 '쿠션 좋은 것 신으세요'라는 말밖에 못 들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아옵니다."

―병원에서도 모르는 걸 안다고요?

"2년 전쯤 거제도에서 한 남자 손님이 찾아왔어요. 어떤 신발을 신어도 발이 불편해서 엑스레이를 찍었답니다. 뼈 어디가 문제인지는 나왔대요. 도무지 발 바깥이 왜 아픈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이와 펜으로 그려가면서 설명해줬지요. 지금 발바닥 아치(arch)가 무너져서 발이 새끼발가락 쪽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래서 발 바깥 날이 아픈 거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한 시간 정도 했더니 나중에 '사실 내가 정형외과 의사인데 왜 발이 아픈지 몰라서 왔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손님 여기서 신발 몇 켤레 맞추고 갔어요."

―이런 기술은 전수받은 건가요?

"가르쳐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발을 오래 관찰하고 만져보고 신발도 만들어보니까 알 수 있는 거지요."

―대표가 직접 신발을 만듭니까?

"대표는 무슨. 나 여기 직원이에요. (신발 진열대를 가리키며) 여기 등산화 거의 다 내가 만들었어요. 아예 디자인 새로 만든 것도 있고요. 신발 만들 줄 모르면 발을 제대로 보지 못해요. 손님한테 신겨보고 어디가 불편하다 하면 얼른 고쳐줘야 하잖아요. 요즘도 주문 많은 날엔 출근하자마자 4층에 올라가서 칼이랑 망치 들고 신발 만들어요. 기술자 중에 내가 나이로는 뒤에서 둘째니까 형님들 사이에서 게으름 피울 수도 없어요."

구두 한 켤레 주문하면 한 달 뒤 완성

송림수제화에 손님이 처음 오면 임 대표가 발을 보고 길이와 너비를 잰다. 치수를 잰 뒤엔 종이에 발을 대고 테두리를 그려 발 모양을 기록한다. 그러고는 발바닥 모양을 석고로 뜬다. 발바닥 아치가 얼마나 깊은지, 발가락은 어떤 모양인지 파악하고 평균 경력 30년의 기술자들과 신발을 어떻게 만들지 상의한다. 그 발에 가장 편한 가죽, 가장 적합한 모양으로 신발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자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주는 '토털 제화'는 우리나라에 이곳 한 군데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서 장사가 되나요?

"장사는 되는데 남는 게 별로 없어요. 등산화 같은 건 한 켤레 70만원 해도 재료비가 대부분이에요. 우리가 등산화 만들 때 쓰는 게 스위스의 쉘러 원단인데 원가가 미국 고어텍스의 몇 배예요. 등산복은 몰라도 등산화에 쉘러 원단 쓰는 건 아무 데도 못 봤습니다. 그만큼 수지가 안 맞는다는 거죠. 구두도 송아지 원피를 그대로 쓰기 때문에 재료비가 많이 들어요. 인건비까지 감안하면 남들 100원 남길 때 우리는 30원 남기는 셈이지요."

―사업가로서 욕심 안 나나요?

"아버지가 항상 이 말씀은 하셨어요. 많이 먹으면 많이 싸긴 하는데, 그냥 적게 먹고 적게 싸면 된다(웃음). 우리 기술자들한테 월급 안 밀리고 가족들 먹고살 만큼 벌어요. 그 정도면 돼요. 돈 욕심 있으면 여기저기 납품하겠다고 계약하면 됩니다. 그러면 손님들 발에 맞춰주기 어렵지요. 사후 관리도 제대로 안 될 거고요. 발 편해지려고 우리 가게 오는 건데 그렇게 장사해서 되겠습니까?"

―광고도 안 한다면서요?

"우리 손님들 입김이 센가 봐요. 신어보고 편하니까 자꾸 주변 사람들을 데려와요. 소문 듣고 새 손님이 계속 오는 거죠. 한 번 손님이 되면 평생 우리 신발 신어요. 우리 가게 찾는 사람 중에 편한 신발 찾아서 팔도를 돌아다니다 오는 사람이 많아요. 여기저기 다 찾아다녔는데도 못 찾았던 거죠. 손님의 95% 정도는 꼭 다시 주문하러 옵니다."

―주문하고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완성품을 받기까지 최소 1달은 걸려요. 우리 기술자가 8명인데 최대한 많이 만들어도 하루에 최대 10족 만들거든요. 신발 만드는 과정이 생각보다 아주 복잡합니다. 세밀하게 나누면 한 1000단계 정도 공정이 있어요. 손님이 중간에 들러서 가봉도 해야 합니다. 손님으로서는 참 귀찮죠. 그렇게 까다롭게 해야 발에 딱 맞는 신발이 만들어져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도 신발 안 만들어줍니다."

―주문을 해도 안 만들어준다고요?

"어차피 만들어줘도 불편할 걸 뭐 하러 만듭니까. 그냥 돌려보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엄지발가락 밑 뼈가 툭 튀어나와 있는 사람이라 우리가 보기에 그한테 맞는 모양과 가죽의 신발을 권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는 그 모양이 싫고 자기 발과 아주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달라고 한단 말이죠. 그러면 못 만든다고 말해요. 그러면 몇 주 안에 그 손님이 다시 와서 맞춰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발 편한 신발은 예쁘지 않죠?

"오랫동안 연구했지만 신발의 편안함과 디자인 둘 다 잡을 순 없어요. 우리 가게는 편안함이 절대 우선입니다. 그다음에 디자인을 생각해요. 기성화는 디자인을 훨씬 신경 쓰는데 그러면 사람들 발이 틀어지고 점점 아프지요. 오래 못 걷는 건 당연하고요. 디자인 연구도 하고 있지만 우리 가게는 무조건 편안함이 1순위예요. 걷고 뛸 때 맨발로 움직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만드는 거죠."

4대째 이어지는 신발 名家

임 대표는 송림수제화의 세 번째 주인이다. 임 대표의 아버지 임효성(2014년 별세) 회장이 2대, 임 회장의 외삼촌 이귀석(1996년 별세)씨가 초대 사장을 지냈다. 지금 송림수제화를 지키는 기술자 대부분이 임 대표의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제일 막내 기술자가 50세이고 둘째가 52세인 임 대표다. 그 위로는 평균 경력 30년 이상의 기술자들이 든든히 버티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는 임 대표의 장남 승용(24)씨도 일을 배우고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승용씨는 신발을 들고 작업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가르치나요?

"학원처럼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익혀야 하는 거죠. 공정 배우면서 자기 발에 맞는 신발부터 만들어보라고 했어요. (술이 달린 갈색 남성 구두를 꺼내오며) 이게 자기 것으로 처음 만든 신발인데, 내가 보기엔 신발 아니에요(웃음).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놔둬야지요. 내가 봤을 땐 안 되는 게 보이는데, 그럴 때일수록 직접 해봐야 왜 안 되는지 알게 되거든요."

―가업을 잇겠다니 기특하네요.

"우리나라에선 신발 만드는 사람을 '갖바치'라고 부르며 천하게 취급했었잖아요. 내가 이 회사 들어오던 1980년대만 해도 그랬어요. 일을 배우겠다고는 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신발 만든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냥 아버지 일을 도와드린다고 얼버무리곤 했죠. 그런 생각 하면 아들한테 아주 고마워요. 선뜻 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신발 만드는 게 재밌다는 것도 고맙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본드랑 고무 냄새 맡아가면서 손으로 노동하려고 하겠어요."

―정말 100년 기업 되겠는데요.

"4대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꿈만 같아요. 아들이 나와 같은 길을 간다는 것도 감회가 남다르고요. (아들을 가리키며) 이 친구가 신발 만드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배우면 아마 젊은 사람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신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될 겁니다. 물론 본인이 많이 노력해야겠지요." 신발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승용씨 손톱 주변이 새까맸다. 아버지 눈에는 차지 않겠지만, 신발 만드는 사람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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