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혼일독사(昏日讀史). '어둡고 혼돈스러운 날에는 역사책을 읽는다.' 역사는 판례집(判例集)이기 때문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는 이미 경험해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서양 삼국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앙드레 모루아(1885~1967)가 쓴 '영국사' (1937), '미국사'(1943), '프랑스사' (1947)를 필자는 서양 삼국지로 생각한다. 평일(平日)에는 명나라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었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업그레이드되는 이 시점에서는 프랑스의 저명한 문필가인 모루아의 삼국지가 훨씬 영양가가 있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같은 역사책이라도 역사가가 저술한 역사는 딱딱한 갈비뼈 같은 맛이라면, 문학가가 쓴 역사책은 이 딱딱한 갈비에다가 부드럽게 다진 고기를 떡처럼 붙여 놓은 맛이다. 마치 '떡갈비' 같다고나 할까. 역사가는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고증만을 추구하지만, 문학가가 쓴 역사책에는 저자의 주관적 감수성이 묻어 있는 탓이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영국사는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의 연속이었다. 1215년 왕권을 제약하는 법률 문서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가 타협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하려고 했던 영국 정신을 보여준다. 프랑스 역사는 혁명이 뭔지를 보여주는 역사다. 세계 모든 혁명의 교과서가 되었다. 미국사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군이 패자인 남군을 학대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던 면이 주목된다. 역시 링컨의 역할이 돋보인다.

모루아의 삼국지를 한글로 모두 번역한 사람이 신문사 파리 특파원을 지낸 신용석(76)이다. 부친이 인천의 '신외과'로 유명했던 신태범(愼兌範·1912~ 2001)인데, 미식가이자 수필가였고 의사였던 신태범이 40년대에 모루아의 일어판 영국사·미국사를 읽고 감명을 받아 70년대에 자비로 출판을 하였다. 신태범은 아들인 신용석에게 '내가 미국사를 했으니 네가 나머지를 꼭 번역하거라'는 당부를 하였다. 신용석의 조부인 신순성(愼順晟·1878~1944)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장이다.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에 양무호 초대함장을 지냈다. '지금이 몇 시인가?'를 알고자 했던 제물포 신씨(愼氏) 집안의 정신이 앙드레 모루아 삼국사를 번역하게 만든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