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말 대선 출사표 격으로 쓴 '불구가 된 미국'이란 책에서 한국이란 단어는 딱 다섯 번 나온다. 모두 "한국·일본·독일을 지켜주는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받고 있는가?"란 취지의 내용에서다. 그의 답은 "우리는 받는 것이 없다"로 한결같다. 이 같은 트럼프의 '안보 무임승차' 인식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그는 이미 1987년 미 주요 신문에 기고문을 내고 "왜 일본·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부자(富者) 나라를 미국이 돈 내고 지켜주느냐"고 했다.
이 때문에 주한 미군 주둔 비용 약 2조원 중 절반인 9300여억원을 한국이 부담하고 있다는 주장은 트럼프에게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트럼프는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에 대해 "푼돈(peanut)"이라거나 "왜 100%는 안 되느냐"고 해왔다.
한·미 양국은 1991년부터 협상을 통해 주한 미군 주둔 방위비를 분담해오고 있다. 1991년 1073억원이었던 한국 측의 분담금은 지난해 9320억원으로 9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원화 기준으로 6.5배 늘었다. 2014년에 체결한 9차 합의안은 2018년까지 유효해, 이르면 내년부터 한·미는 분담금 협상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25년간 분담금을 9배로 늘렸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트럼프의 발언 배경은 뭘까. 전문가들은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당선인은 과거 미국이 희생했던 것에 대한 대가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트럼프의 정책 자문역인 알렉산더 그레이와 피터 나바로가 지난 7일 외교·안보 전문 매체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 잘 나타난다.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이 각각 세계 11위와 3위의 경제 대국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납세자들이 파멸적 전쟁을 겪은 두 나라를 재건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돈과 피로 두 동맹이 성숙한 민주주의와 선진 경제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즉 한국의 번영은 '미국의 돈과 피'를 바탕으로 이뤄졌고, 이에 대한 이자까지 감안할 때 '미군 주둔 비용의 100%를 대라'는 주장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향후 한·미 방위비 협상은 철저한 주고받기 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트럼프와는 철저히 비즈니스적 숫자로 협상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늘릴 경우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요구하거나, 방위비 분담금을 늘리지 않으려면 대신 미국의 무기 구입을 늘려가는 식으로 '대차대조표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