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백악관 잔디밭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국빈 만찬이 열렸다. 이날의 주인공은 초대 손님인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도, 임기 말에 최고 지지율(55%)을 유지하는 오바마 대통령도 아닌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52)였다.

AFP 연합뉴스

한쪽 어깨를 살짝 드러내고 가슴과 허리에 입체적인 주름 모양이 잡힌 로즈골드(붉은 기운이 도는 금색)빛 드레스는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을 따라 흐르는 듯한 드레스의 옷감이 허리와 엉덩이의 굴곡을 다 드러내 여성성을 강조하면서도 청동(靑銅)을 연상케하는 색감 덕분에 강인한 이미지도 함께 보여줄 수 있었다. CNN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유력 언론들은 오바마 대통령과 렌치 총리가 나눈 대화보다 미셸의 드레스를 그날의 주요 뉴스로 다뤘다. 이날 미셸이 입은 드레스가 단지 아름답기만 했거나 유행을 반영하는 데 그쳤다면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입은 것은 '드레스'가 '메시지'였다.

옷으로 말하는 여자

8년간 백악관에 몸담은 미셸은 정치인은 아니지만, 미래의 대선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산했다. 어린이 비만 퇴치나 여성 권리 향상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미국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 연설로 여론의 극찬을 받았다. 최근에는 힐러리는 물론 남편인 오바마 대통령의 인기도 앞지르게 됐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의 '패션 정치'였다. 미셸은 패션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생각을 전달하면서 존재감을 알렸다.

미셸이 이탈리아 총리 부부와의 만찬에서 입은 의상은 베르사체의 쿠튀르 라인인 아틀리에 베르사체의 맞춤 드레스로,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직접 제작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 위해 해당 국가의 브랜드와 디자이너를 고른 것이다. 2011년 백악관을 방문한 이명박 전(前) 대통령 부부를 맞이할 때는 한국계 디자이너 두리 정이 만든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많은 이탈리아 브랜드 중에서 왜 베르사체를 골랐을까? 이 브랜드의 수장(首長)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국빈 만찬이 열리기 며칠 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여러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미셸은 클린턴의 지지 연설을 하면서 "어떤 여성도 이런 식으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며 트럼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연설 직후 여성 디자이너가 만들고, 강인한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드레스를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난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읽어서였을까.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이날 저녁을 먹으면서 미셸에게 "총리로서, 또한 어린 딸의 아버지로서 당신에게 매우 감사한다"고 말했다. 미셸의 드레스는 최후의 만찬을 최고의 만찬으로 바꿔놨다.

재클린을 넘어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미셸을 "존 F 케네디의 퍼스트 레이디 재클린 이후 등장한 미국 정계 최고의 패셔니스타"라면서 "미셸은 재클린을 넘어섰다"고 했다. 재클린은 구찌에서 그의 이름을 딴 가방 '재키 백'을 만들 정도로 패션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쓰고 다닌 알이 큰 '버그 아이' 선글라스는 '재키 선글라스'로 불리면서 유행을 낳았다. 부유한 명문가에서 나고 자란 재클린이 즐겨 입은 것은 지방시, 크리스티앙 디오르 같은 유럽의 명품 브랜드였다.

①2011년 1월 한·미 정상회담 국빈만찬에서 입은 보라색 드레스는 한국계 디자이너 두리 정이 디자인했다. ②2009년 5월에 입은 타쿤의 코트. ③2016년 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 연설 때 입었던 나르시소 로드리게즈의 원피스는 당일 품절이 됐다. ④2014년 5월에 입은 나임 칸의 원피스. ⑤2008년 10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 전 방송에 입고 나온 제이크루 카디건. 품절 사태를 빚으면서 ‘미셸 카디건 현상’을 만들어냈다.

미셸 역시 퍼스트 레이디들의 단골 브랜드 '캐롤라이나 헤레라'나 '오스카 드 라 렌타'를 입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가 즐겨 입는 것은 미국의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이다. 그는 나임 칸이나 타쿤, 제이슨 우 등을 공식 석상에서 자주 입는다. 또 갭, H&M, 제이 크루처럼 대중적인 브랜드를 선택할 때도 많다. 미셸을 도와서 잘 알려지지 않은 디자이너들의 옷을 골라주고 스타일링 조언을 해주는 이는 스타일리스트 매러디스 쿱(Koop). 쿱은 오바마가 시카고 상원의원이던 시절 미셸이 시카고에서 자주 가던 패션 부티크 '이크람'에서 세일즈를 담당하면서 미래의 퍼스트 레이디와 인연을 맺었다. 2009년 미셸의 전속 스타일리스트로 임명돼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미셸은 패션 잡지 바자에 쿱에 대해서 "패션뿐만 아니라 상황과 메시지를 생각할 줄 아는 능력에 감탄했다"고 칭찬했다. 이 둘의 협업으로 이뤄낸 성과가 패션계과 정치계에 미친 파장은 작지 않다. 한창 동성결혼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렬했을 때, 그는 동성 연인과 결혼한 나르시소 로드리게스의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오바마의 신년 연설에 등장했다. 그날 이 옷은 품절이 됐다. 여성 인권이 이슈일 때는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쇼 '런웨이 프로젝트'에서 우승한 신인 크리스천 시리아노의 옷을 입었다. 시리아노는 비쩍 마른 모델이 아닌 평균 체형보다 살집이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미셸이 젊은 디자이너들 옷을 고르면서 가장 많이 퍼뜨린 메시지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남편인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였던 시절부터 내세웠던 구호이기도 하다. 미셸은 백악관에 대학생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패션 스쿨에 다니는 무명(無名)의 학생이 만든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가 총애하는 디자이너 타쿤은 태국계, 제이슨 우는 대만계, 나임 칸은 인도계, 이사벨 톨레도와 나르시소 로드리게스는 쿠바계다. 모두 이민 가정 출신이다. 미국에선 출신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재능과 노력만 있다면 퍼스트 레이디도 당신의 옷을 입는다는 희망이 바로 미셸 옷에 담긴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