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경주에서 또 여진이 발생했다. 한 일본 전문가의 우려대로 또 다시 규모가 적지 않은 지진이, 혹시 전국적으로 발생한다면 어떤 물품을 챙겨야 할까. 지진의 나라, 일본에서는 '재난 팩(pack)'을 구비하는 일이 특별한 일로 취급받지는 않는다.
지난 9월25일자 아사히 신문에도 '재난 체험을 토대로 한 방재용품의 결정판'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지진 등 재난이 발생해 고립됐을 때 3일간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재난대비용 패키지다. 광고는 일본기상협회 소속 방재사(防災士) 구보다 게이지(久保田敬二)의 추천사를 인용하고 있다. "물을 먹지 않은 상황에서 생존한계는 72시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피난가방은 가장 중요한 물과 식료품이 3일치 들어있는 것이 최대특징이고…바퀴가 달려있어 여성이 운반하기도 쉽습니다."
내용물은 ◈비상식량 (1)바퀴가 달린 33ℓ용량 배낭 (2)10ℓ용량 접이식 물탱크 (3)유통기한 5년 2ℓ 생수 3통 (4)한국식 햇반 3개(스푼포함) (5)야채카레 3개 (6)건빵 3캔 (7)파스타 3봉지(카르보나라, 페페론치노, 버섯) (8)양갱 5개 ◈정보 파악용 (9)손전등 겸용 충전식 트랜지스터 라디오 (10)방재 매뉴얼 책자 ◈위생 및 호신용 (11)방화두건 (12)우비 (13)물티슈 (14)간이 화장실 3개 (15)항균 물수건 (16)마스크 7개 (17)알미늄 블랭킷 (18)간이 베개 (19)목장갑 등 모두 19가지다. 이 패키지의 가격은 세금포함 2만 1384엔(23만 3500원).
패키지에는 물을 비롯, 열량을 내주는 탄수화물류, 화염이나 충격에 대비한 방재 두건, 노숙시에 필요한 알미늄 이불, 간이변기와 항균티슈, 마스크 등 위생 관련 물품, 정보취득을 위한 라디오와 매뉴얼 책자가 들어있다.
알미늄 브랭킷(이불)은 쉽게 말하면 은박지로 만든 보온 시트. 열을 가두는 속성 때문에 재난 현장은 물론 마라톤이나 고산 등반 때에도 필수품으로 분류된다.
한국인들에게 낯선 물건은 ‘방재 두건(頭巾)’. 난연성 소재로 만들어 평소에는 등받이로 쓰다가 화재가 났을 때 머리에 쓰고 탈출하거나, 지진으로 물건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머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쓴다. 일본에서는 유치원 안전 교육부터 ‘방재 두건’ 사용법을 익힌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물품을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비용은 얼마나 들까. 기자가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관련 물품을 구해봤다. 국산으로 대체 가능한 것을 구했으나, 일부 품목은 일본산이 불가피했다.
광고 목록에 적힌 18가지(방재 매뉴얼 제외) 물건을 구해보니 가격이 22만원이 넘었다. 생각보다 비용이 높게 나온 것은 240원짜리 목장갑을 사는 데 배송비 3000원을 지불해야 하는 온라인 쇼핑의 함정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니, 물건값 16만원에 배송비가 6만원이다.
그래서 마트에서 구입가능한 품목(목장갑, 간이베개, 마스크, 물티슈, 항균티슈, 양갱, 스파게테, 건빵, 햇반, 카레)을 제외하고 인터넷 구매가 유리하거나 불가피한 상품만을 주문하니 가격은 대략 20만 6000원. 이 경우에도 배송비가 4만원에 육박하는데, 방재두건이나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이 외국에서 배송되기 때문이다. 목장갑 등 10종의 오프라인 구매 가격은 대략 2만2500원. 발품을 팔아 마트와 수입품 상가 등을 뒤지면, 18개 품목을 15만원 내외로 구입하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요즘 인터넷에는 ‘지진에 대비해 재난팩을 꾸려봤어요’라는 경험담이 인터넷에 속속 온다. 진지한 글도 있고, 놀이처럼 올리는 경우도 있다. 가격이 얼마가 됐건, 그 안에 물건이 몇점이 들어있건, ‘재난 팩 만들기’는 미지의 불안을 잠재우는 일종의 ‘심리재(心理材)’가 되고 있다. 쓰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한 이 ‘심리재’를 전국민이 구매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