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척추 수술을 크게 했어. 한 번 일어나려면 눈물이 뚝뚝 나고…. 그나마 남은 돈은 그때 투병 생활하며 다 써버렸지."
지난 28일 서울 은평구의 비탈진 골목길에 들어선 6평(20㎡)짜리 작은 집. 독거 노인인 김진석(가명·65)씨가 자신이 겪은 병고(病苦)를 어렵게 털어놨다. 책상 겸 식탁으로 쓰는 작은 탁자 위엔 진통제, 혈압약,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 등 온갖 약 봉지가 수북했다. "기초생활수급비 57만원으로 먹고산다"는 김씨에게도 1980~90년대 태국·호주 등지에서 해외 현지 여행사를 운영하던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보여준 휴대전화엔 해외 유명 여행지에서 선글라스 끼고 잘 차려입은 40대 남성의 사진이 여럿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불시에 닥친 질환은 남부러울 것 없던 중산층의 삶을 한순간에 바꿔버렸다.
◇"죽는 것보다 두려운 건…"
그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지칭한 1990년대 초반엔 세계 각국이 그의 일터였다. 국내 여행사에서 직장 생활했던 노하우를 살려 태국 방콕, 캄보디아, 호주 시드니 등 해외에서 현지 여행사를 운영하며 국내 여행객들에게 현지 가이드와 숙박 등을 제공해주는 중개업을 했다. 그러다 1997년 IMF 경제 위기로 여행객이 확 줄자 2000년 즈음 사업을 완전히 접었다고 한다.
김씨는 "큰 병이 생기기 전에 부동산 투자로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자산이 바닥나 버렸다"고 했다. 2013년 초 허리를 다친 탓이 컸다. "하루는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실려갔어요. 골다공증이 진행돼 척추 골절까지 왔다는 진단이 나왔지요." 척추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한 첫 5개월 동안에만 병원비가 2500만원 나왔다. 이후에도 치료비가 통장에서 600만~700만원씩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한 번 큰 병이 생기자 가족 관계까지 끊기고 '마음의 병'인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돌봐줄 사람도 없어서) 나중엔 홀로 일회용 기저귀를 차는데…." 김씨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재는 상태가 많이 호전된 김씨는 최대한 근검절약하려고 노력한다. 술은 아예 입에도 안 대고, 점심은 지역 복지관에 가서 해결한다. 두 달에 한 번 지원 나오는 20㎏짜리 쌀로 밥을 짓고, 1000원짜리 채소 씨앗을 사와 작은 텃밭에 심고는 고추며 방울토마토를 직접 길러 반찬거리에 보탠다. "이런 노후가 찾아올지 상상도 못 했지요.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다만 몸이 또 큰 병이 찾아와 아프고 힘들어 또 무너질까 봐 그게 두려운 거지요."
◇중병에는 중산층도 무너져
중산층의 노후를 위협하는 최대 요인은 '병'이 꼽힌다. 보건복지부의 '2014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10명 중 9명(89.2%)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고 ▲평균적으로 2.6개의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노인 1만451명은 '가장 부담스러운 것'으로 주거비(35.4%)에 이어 보건의료비(23.1%)를 꼽았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고령자 의료비 추정' 자료에 따르면 73세 노인이 1년간 고혈압으로 외래 진료를 받으면서 골절로 18일, 뇌출혈로 90일 입원했을 경우 본인 부담 의료비가 677만원으로 조사됐다.
신현민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장 역시 한때 연간 수십억 매출을 올리는 회사를 운영했지만 "지금은 사실상 소득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1997년 다발성경화증이란 희귀 질환에 걸리면서 고가의 검사와 진료를 연거푸 받는 바람에 수억원이 의료비로 나갔다는 것이다. "매달 약값 등에만 30만~40만원 들고 장애 관리까지 따지면 100만원 넘는 돈이 꾸준히 들었지요. 병 때문에 나는 물론 간병해 주는 배우자까지 일을 못 하면서 더 어려워진 거지요."
김만석(가명·68)씨 역시 작년에 뇌졸중 진단을 받고 간병인을 쓰기 시작했다. "작년 한 해 진료비 2000만원에 간병비만 추가로 2500만원쯤 들었다"는 김씨는 "결국 예금 통장까지 깨는 사태까지 왔다"고 말했다. 언제 '실버 파산'에 이를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노후에 맞는 '의료비 폭탄'은 극빈층보다 중산층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신영전 한양대 의과대학 교수는 "극빈층은 의료급여 혜택을 받지만 은퇴해 소득이 끊긴 노후 중산층은 오히려 한꺼번에 자신의 목돈을 지출해야 한다"며 "의료비 지출이 전체 지출의 10%를 넘어가면, 그렇지 않은 가구보다 빈곤층으로 떨어질 확률이 1.4배 높아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