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안경을 쓴 소녀의 하얀 볼엔 뾰루지가 돋아 있었다. 이 작은 체구에서 시속 110㎞의 강속구가 나온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운드에 서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완벽한 와인드업 자세를 거쳐 뿜어져 나온 공은 거침없이 포수 미트에 꽂혔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 2016 세계여자야구월드컵(LG 후원) 한국 대표팀의 막내인 김라경(16·계룡고·사진)은 한국 여자 야구의 '보배'로 꼽힌다.

그가 20~30대 언니들 틈 속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장기인 강속구 때문이다. 중3이던 지난해 김라경이 던진 직구 최고 구속은 113㎞. 세계 정상급 여자 야구 선수들이 최고 120㎞의 공을 던지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느림의 미학'으로 불리는 KBO리그 유희관(두산)의 평균 직구 구속은 120㎞ 후반이다.

김라경은 3일 개막한 야구월드컵 조별리그, 파키스탄과의 1차전(7이닝제)에서도 강력한 직구를 바탕으로 1과 3분의 1이닝 동안 삼진 3개를 뽑아내며 승리투수가 됐다. 그는 4일 쿠바전에서도 1과 3분의 2이닝 1실점 했지만 좋은 피칭을 보였다. 이날 한국 대표팀은 1―3으로 뒤지던 6회말 타선 폭발로 3점을 보태며 4대3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은 조별리그 2연승으로 남은 베네수엘라전(5일)에 관계없이 사상 첫 6강 슈퍼라운드 진출을 확정 지었다.

김라경이 야구에 입문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지금은 프로야구 선수가 된 오빠(한화 이글스 김병근)의 매 경기를 따라다니며 야구의 매력에 빠졌다. 20명이 넘는 계룡리틀야구단엔 김라경이 유일한 여자 선수였다. 그는 "남녀 모두 똑같은 훈련을 받았고 덕분에 빠르게 야구 실력이 늘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선 '야구 소녀'로 통한다. '어떻게 여자가 그렇게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느냐'며 신기해하는 친구도 있고, 합숙훈련 때 먹으라며 과자를 챙겨주는 팬도 생겼다.

대학 입시를 고민할 나이에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 김라경은 야구를 하고 싶은 만큼 잠을 줄였다. 시험 기간엔 4시간만 자며 학교 수업과 야구 훈련, 학원(수학·영어), 자습으로 하루를 빽빽하게 보낸다. 덕분에 반(30명)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이 좋다. 두 가지를 모두 잘하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야구를 하면서 체력이 훨씬 좋아졌다"며 웃었다. 한때 '프로야구 1호 여자 선수'를 꿈꾸기도 했던 김라경은 목표를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진학으로 바꿨다.

"대학에 들어가 야구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여자 야구의 저변·인프라를 늘리는 방법을 고민해 보려고요. 후배들이 고민 없이 야구에만 집중하도록 길을 닦는 개척자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