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6일 오후 부산 영도에서 출항을 앞둔 139t짜리 쌍끌이 어선 선장 A(51)씨가 컨테이너로 만든 선원 휴게실을 찾았다. 선원 10여 명이 모여 화투를 치고 있었다. 선장이 찾은 사람은 '제비'라고 불리는 40대 남성이었다. '제비'는 부산의 한 여성 전용 유흥업소인 '호빠(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마약 중개상이었다. 선장이 30만원을 찔러주자 제비는 담뱃갑만 한 비닐봉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줬다. 필로폰이었다.
배로 돌아온 선장은 선원들에게 출항 지시를 내렸고, 고등어와 꽁치를 잡는 이 배는 선장·선원 12명을 태우고 부산 앞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선장실로 돌아온 선장은 물에 희석한 필로폰을 일회용 주사기에 넣은 뒤, 자신의 팔에 바늘을 꽂았다. 선장은 조업 기간 열흘 동안 마약에 취해 남해 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조업 지시를 내렸다. 일반 선원들은 출입금지 구역인 선장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없었다.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선장은 필로폰 봉지 등을 바다에 버렸다. 하지만 바지 뒷주머니에 미처 버리지 못한 주사기 2대가 남아 있었고, 첩보를 입수하고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양경찰에게 붙잡혔다. 선장은 지난 1년간 선상에서 수시로 필로폰을 투약한 것으로 조사됐다.
부산해경은 이 선장뿐 아니라 마약에 취해 다른 배를 운항했던 선장과 항해사 등 23명도 적발했다. 이들에게 마약을 판매한 '제비'도 잡혔다. 그는 선원 휴게실 자판기 커피에 필로폰을 탄 '시음용 뽕'을 무료로 나눠주며 '선원 고객'을 확보했다고 한다. 해경은 '제비'가 근무하는 유흥업소 벽장 안에서 400명이 동시 투약할 수 있는 양의 필로폰을 발견했다. 해경 관계자는 "마약 유혹에 노출된 선원들이 적지 않았다"며 "해상 마약범을 잡기엔 해경 수사 인력이 매우 부족하다"고 했다.
마약 안전지대가 사라지고 있다
국내 마약 범죄 동향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적발된 마약 사범이 1만1916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한 가운데 선원, 교사, 회사원 등 마약에 손대는 일반인이 늘어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마약 경유지로 활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최근 부산경찰청은 대구의 한 국립대 교수를 마약 혐의로 체포했다. 그는 태국에서 대마씨를 몰래 가져와 부산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수년간 대마잎을 재배했다. 그는 집 안에 전열기와 반사판, 환풍 장치 등 대마초 제조 설비를 갖춰놓고 5년간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이사할 때도 대마초 제조 설비를 꼭 챙겨서 다녔다고 한다. 지난해 강원도에선 도로변에 차를 세워놓고 필로폰을 여러 차례 투약한 중학교 교사가 적발됐다. 그는 학기 중에 필로폰 등을 흡입한 것으로 조사돼 학부모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최근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광주광역시에선 유명 영어강사 오모(23)씨가 유럽에서 대마를 밀수하다 적발됐다. 오씨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계좌 이체나 카드 결제 대신 온라인 가상화폐 '비트코인'을 사용해 대마를 주문했다고 한다.
지난 1월엔 축협 전 간부가 필로폰을 수차례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전북 모 축협 간부인 고모(62)씨는 전주 한 모텔에서 필로폰을 커피에 타서 마시는 방법으로 8차례 투약했고 필로폰 1.8g과 대마 등을 소지한 혐의를 받았다. 광주광역시에선 폭력전담반 형사로 마약류 수사를 담당했던 전직 경찰관이 필로폰 투약·유통 혐의로 입건됐다.
가정주부 마약사범도 적지 않다. 지난 2월 광주광역시 서부경찰서는 광주와 부산, 아산, 인천 등 전국적으로 1억8000여만원 상당의 필로폰을 유통시킨 김모(46)씨 부부와 이들로부터 마약을 산 뒤 투약한 혐의로 가정주부 이모(57)씨와 회사원 등 13명을 입건했다. 이들은 빈 담뱃갑에 필로폰을 숨겨 넘기는 등 수법을 사용해 기차역, 열차 화장실, 모텔, 고속도로 휴게소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판매했다. 지난 4월 전남 순천경찰서는 조직폭력배가 낀 마약 조직에 대한 수사 결과 이 조직에서 마약을 구입한 상당수가 가정주부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들뿐 아니라 최근 수개월 사이 마약 혐의로 적발된 사람 중에는 유명 아이돌 그룹의 스타일리스트, 유통회사 대표, 미용실 원장 등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돼 있었다.
대검찰청 마약 백서에 따르면, 지난 5년 전과 비교해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마약 범죄는 234건에서 62건으로 크게 줄어든 반면, 일반 회사원은 115명에서 514명으로, 금융·증권맨은 4명에서 18명으로, 학생은 92명에서 139명으로 마약 범죄가 대중화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SNS를 통해 마약류를 '직구'할 수 있게 되면서 일반인들이 쉽게 마약에 손댈 수 있게 됐다"면서 "국제 마약조직들이 마약 청정국으로 알려진 우리나라를 중간기지 삼아 거래를 하는 사례도 속속 적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외국인 마약 범죄도 심각
국내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의 마약 범죄도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3월 경남 양산시의 한 외국인 식당에선 태국인 근로자 10여 명이 마약과 도박 파티를 벌이다 경찰에 잡혔다. 이들이 복용한 마약은 붉은색 알약 형태의 '야바'로 2, 3일간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환각성이 강하다고 한다. 식당 인근 주민들은 "태국 남녀 근로자들이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식당에 모여 술 마시고 놀다 갔다"고 했다. 이들이 복용한 야바는 태국인이 몰래 밀반입한 것으로 경북 경남 일대 동남아 출신 근로자들에게 주로 팔렸다. 경북경찰청은 이 사건으로 태국인 근로자 28명을 구속했다.
두 달 전 인천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출신 조선족과 한족이 중심이 된 마약조직원 10여 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중국 본토 조직과 손잡고 국제 우편 등을 통해 필로폰을 반입했으며, 서울과 안산·시흥·인천 등 외국인 집중 거주 지역에 마약을 유통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외국인이나 중국동포들이 마약 운반책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두 달 전 인천공항에선 신체의 은밀한 부위에 필로폰을 숨겨 밀반입하려 한 30대 중국국적 여성이 경찰에 잡혔다. 수시로 중국과 한국을 왕복했던 그녀는 그동안 9차례에 걸쳐 필로폰 440g을 밀반입했다. 필로폰 440g은 암시장에서 14억여 원에 팔리며, 한 번에 1만4000여 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다. 이 여성은 처음엔 범행을 부인했으나 공항 병원의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몸속에 마약을 감춘 사실이 드러났다. 범죄 통계를 봐도 외국인 마약 범죄 증가세는 뚜렷하다. 2011년 적발된 외국인 사범은 295명이었으나, 2012년 359명, 2013년 393명, 2014년 551명, 작년엔 640명으로 5년 사이 100% 이상 늘어났다.
마약 경유지로 떠오른 한국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마약청정 지역으로 불렸다. 우리나라를 거치는 수하물을 상대 국가가 느슨하게 검색하다 보니 요즘은 국제 마약조직이 이 점을 노리고 한국을 마약 중간 기착지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아편의 70%는 '황금의 초승달 지대'로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된다. 아프가니스탄산(産) 아편은 인접국인 이란과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는 '발칸 루트', 역시 이웃한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 일대로 전파되는 '북부 루트'가 주요 이동 경로였다. 하지만 최근엔 아프가니스탄 아편이 파키스탄을 통해 중동과 인도, 동남아시아로 옮겨져 헤로인과 모르핀으로 가공된 뒤 북미와 동아시아 등으로 다시 전파되는 '남부 루트'가 마약의 핵심 경로로 부상하고 있다고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분석했다.
이 '남부 루트'의 중간 기착지로 우리나라가 이용되는 사례가 여러 차례 적발됐다고 한다. 헤로인을 콘돔에 넣어 베트남에서 인천공항으로 몰래 가져오려던 베트남인 운반책과 인도에서 헤로인을 밀반입하던 나이지리아 운반책이 검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매매될 마약이 한국을 경유해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 야쿠자 조직이 마카오와 홍콩에서 제조된 필로폰을 국내로 밀반입한 후 다시 일본으로 수출하려다 적발되는 식이다.
일부 마약 조직은 출입국 과정에서 의심을 피하려 우리나라 대학생과 유학생, 무직자를 운반책으로 고용한다. 지난 3월 검찰에 적발된 대구의 한 여대생은 SNS에 올라온 "기간은 일주일, 대가는 200만원, 간단한 운반, 여권 필수"라는 글에 이끌려 20대 남성을 만났고, 그로부터 "공짜 해외 여행하고 돌아오면 돈을 준다"는 말을 듣고 캄보디아에서 작은 물건을 국내로 들여왔다가 마약 밀매 혐의로 체포됐다. 여대생이 만난 20대 남성은 검찰이 주시했던 유명 마약조직의 조직원이었던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유학생 출신들이 국제 우편 등을 이용해 코카인 같은 마약을 밀반입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