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김경호(가명·33)씨는 지난 20일 회사 앞 상가건물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 경비원과 말다툼을 벌였다. 경비원이 ‘금연! CCTV 촬영 중. 적발 시 과태료 10만원’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가리키며 “여기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 것이다. 김씨가 “이곳은 법적으로 금연구역이 아닌데 무슨 소리냐. 신고할 테면 하라”고 맞받아치면서 갈등이 커졌다.
실제로 이 건물 주변은 종로구청이 지정한 금연구역이 아니다. 이 건물 앞에서 흡연해도 과태료를 부과할 수 없다. 과태료를 경고하는 현수막은 구청이 아니라 건물주가 붙였다. 흡연으로 인한 건물의 피해가 커지자 건물주가 고육책(苦肉策)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사설(私設) 현수막을 붙인 것이다. 이 상가 2층의 한 식당 주인은 "흡연자들이 몰려 건물 주변에 꽁초가 수북이 쌓이고 담배 연기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하다"면서 "입점 업체들이 건물주에게 흡연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해 금연 현수막을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많은 서울 종로구나 중구, 강남 일대에 '사설 금연 표지판'이 늘어나면서 흡연자들과 건물을 관리하는 경비원들 사이에 갈등이 잦아지고 있다. 사설 금연 표지판은 사회적으로 흡연을 규제하는 흐름을 타고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4월부터 '지하철역 입구 10m 이내 금연'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각 구청도 도심 대형 빌딩 주변을 속속 금연구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2011년에 670여 곳에 불과하던 서울 시내 금연구역은 올해 이달 기준 1만6900여 곳으로 5년 만에 약 25배가 됐다. 이런 흐름을 활용해 평소 흡연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건물주들이 사설 금연 표지판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흡연자들이 '사설 금연구역'의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속 담배를 피워댄다는 것이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지하철 강남역 인근 이면도로에 10m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 커피 전문점 3곳엔 '금연구역' '담배 꽁초 금지' 등이 적힌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하지만 흡연자 3~4명은 표지판 앞에 서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운 뒤 꽁초를 버리고 자리를 떴다. 점심시간이 되자 흡연자들은 10여명씩 떼로 몰려와 이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커피 전문점 앞에는 금세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 커피 전문점 직원 최모(여·32)씨는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담배 냄새가 확 들어와 손님들이 인상을 찌푸린다"면서 "담배꽁초 무단 투기는 신고가 가능하지만 흡연 자체는 위법이 아니라서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서울 중구 소공동 T빌딩 경비원 최모(62)씨도 요즘 '담배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점심시간만 되면 직장인 수십 명이 이 건물 앞으로 몰려들어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다. 이 건물과 불과 20m 정도 떨어진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한국은행까지 약 490m 구간은 모두 금연거리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이면도로에 있는 이 건물은 금연거리에서 빠졌다. 최씨는 "건물주가 금연구역이라는 경고문을 붙여놓았지만 흡연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다"면서 "담배를 끄라고 하면 흡연자들이 '이게 당신 땅이냐'고 소리를 질러 싸움이 붙기 일쑤"라고 했다. 흡연자들도 할 말은 있다. 직장인 오모(36)씨는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회사 내에 흡연실이 마련된 곳은 거의 없다"며 "남의 회사 흡연실에 가서 피울 수도 없으니 흡연할 수 있는 건물 앞에서 피우는 것 아니냐"고 했다. 최모(33)씨는 "흡연구역을 없애지만 말고 흡연 공간도 마련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