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엔 피아노와 생수 한 병이 전부였다. 18일 서울 한남동 일신홀. 바리톤 참가자 고병준(27)은 긴장한 얼굴로 베르디 오페라 '팔스타프'의 아리아 중 하나를 힘껏 불러냈다. 셔츠가 땀으로 푹 젖었다. 이윽고 심판의 시간.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45·한국명 윤태현)이 말을 쏟아냈다. "무대 앞으로 나와서 청중과 일일이 눈을 맞춰!" "네 소리에 네가 소름이 끼쳐야 해. 피아노 반주를 잘 듣고 그 분위기에 감정을 실어봐."
사무엘 윤이 누군가. 동양인 가수가 서기 힘든 바그너 음악의 성지(聖地)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2012년부터 주역을 꿰찬 사나이. 그가 종신 성악가로 17년째 근무하고 있는 독일 쾰른 오페라 극장은 유럽 비평가들 사이에서 일류로 꼽히는 곳이다. 2022년까지 스케줄이 꽉 차 버렸을 만큼 전성기를 누리는 그가 시간을 쪼개 이틀간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다. 후배 성악가를 쾰른 극장이 운영 중인 '오페라 스튜디오(젊은 음악가 양성 프로그램)'에 뽑아가기 위해 연 자리. 일종의 '오디션'인 셈이었다.
지난해 초 제1회 마스터 클래스를 열고, 당시 연세대 성악과 4학년이던 바리톤 최인식(27)을 뽑아 데려갔다. 2년치 유학 비용은 음악 애호가인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이 대기로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불과 1년 만에 '일'을 냈다. "지난해 9월부터 단역으로 서기 시작했는데 어떤 역을 시켜도 잘해낸 거예요. 지난 4월 극장장이 '보석 같은 친구를 데려와줘서 고맙다'며 '오는 9월부턴 극장이 돈을 댈 테니 한국 테너를 한 명 더 데려오라'고 했어요. 이번 친구까지 잘해주면 세 번째부턴 파트 제한 없이 뽑게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요." 이번 마스터 클래스에선 테너 김영우(30)가 오는 9월부터 쾰른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활동할 두 번째 성악가로 뽑혔다.
사무엘 윤은 10년 가까이 틈날 때마다 후배 성악가들을 만나 조건 없는 레슨을 하고 있다. "내게 무대에 서는 것과 후학을 기르는 것은 정확히 같은 무게다. 다행히 난 처음부터 잘된 사람이 아니니까"라고 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1994년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 갔지만 4년 동안 콩쿠르에서 열다섯 번 떨어졌다.
반전은 첫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1998년 이탈리아 토티 달 몬테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심사위원이던 쾰른 극장장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 이듬해 쾰른 오페라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갓난애를 품에 안고 넘어간 쾰른은 이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밀라노 라 스칼라, 런던 로열오페라를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스타들의 집합소였다.
주역은커녕 조역의 하인을 소화하며 그는 성공한 가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봤다. 공통점은 끈기와 겸손. 연습 때마다 녹음기를 들고 가 자신의 발음을 녹음한 뒤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 새 역할이 들어오면 관련 음반을 있는 대로 다 사서 모조리 들었다. 사무엘의 시대를 연 밑거름이었다.
'바이로이트의 영웅'은 지난 10년간 섰던 바이로이트 무대를 미련 없이 떨치고 나왔다. 오는 9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바그너 악극 '라인의 황금'의 알베리히를 부를 예정이다. "예전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어서 힘들었지만 이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어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바위를 뚫는 낙수처럼.
다음 달 그는 테너 강요셉(38)과 함께 콘서트 오페라 형태로 펼쳐지는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에 메피스토펠레로 선다. "'저놈, 참 얄밉게 잘한다! 이게 저희한텐 최고의 칭찬이에요. 제가 제일 잘하는 악마 역을 맡았으니까 누구보다 검은 영혼을 보여드릴게요."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8월 19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70-8879-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