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 수위 협의 없음' 문구를 내걸고 신인여배우를 모집했을 때부터 개봉 직전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그 모든 우려를 떨쳐내고 극장에서 승승장구했다. 뜻밖의 '덕후' 몰이로 그들이 이른바 'n차'를 찍어준 덕이 아주 크다. 그런데 관객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와중 결국 터져버린 '불륜 스캔들'에 휘청하기도 했다.
'덕후'들의 'n차 찍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적어도 영화의 금전적 손해는 면하였으니 다행이다. 주인공 여배우의 불륜 행각으로 앞으로는 순전히 영화로서 즐기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아가씨'는 매우 독특한 스타일과 흥미로운 러브스토리로 분명 한국 로맨스 영화로서 나름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독특하게 우아한 영화를 박찬욱 감독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원인은 바로 원작 '핑거스미스'다.
그러고 보니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피면 거의 절반은 원작이 있다. 그리고 세상의 영화들 중에 책을 원작으로 하는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다. 나의 경험으로는 대체로 영화는 원작만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영화 '아가씨'의 경우처럼 서로 전혀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활자로 보는 이야기는 독자 각자가 부리는 상상의 능력치에 따라 제각각의 상(像)을 만들 것이다. 그런데 활자가 영상으로 옮겨질 때는 이미 어느 특정 작가의 상상력을 한번 거친 후가 된다. 이 둘을 비교해보는 것은 나의 상상과 다른 이의 상상을 일렬로 놓고 번갈아 감상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아가씨'와 '핑거스미스'를 시작으로 '책(册)상(像)'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원작과 영화 속의 동일한 어떤 부분을 나란히 놓고 감상해보는 작업을 시작해보려 한다. 부디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오기를 바라며 첫번째 '册像'을 시작한다.
#1. 첫 만남
두 아가씨의 첫 만남에서, 묘사된 감정은 영화와 원작이 서로 상반된다.
드디어 모드를 만난 수전은 그 첫인상을 담담하게 회상한다. 오히려 외모에 대해 약간 실망했다는 뉘앙스마저 풍긴다. 하지만 영화에서 숙희는 히데코의 첫인상에 말 그대로 반하고 말았다.
[[리뷰] 영화 '아가씨',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가녀린 희생자는 기모노를 입고…]
#2. 은골무
아가씨의 표족한 어금니를 은골무로 갈아주는 장면은 원작과 영화가 거의 흡사하다. 이 '은골무'신은 책과 영화 모두, 베드신보다 훨씬 관능적이고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아마도 제일 애착이 가는 한 장면을 꼽으라면 사라 워터스와 박찬욱 감독 모두 이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만큼 이 장면은 작품 안에서 작가와 감독 모두 정성을 다해 묘사하고 있다. 독자와 관객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은골무' 장면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3. "거의 다 익은 것 같아"
교만한 젠틀먼, 혹은 교만한 백작의 귀여운 술수를 묘사한 장면이다. 원작에서 젠틀먼은 오로지 돈만을 좇는, 완벽한 사기꾼의 면모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백작에게 로맨티스트적인 맛이 살짝 가미된다. 히데코를 향한 순정을 아주 소심하게 내비치고 나서, 백작은 최후를 맞는다.
책(冊) :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는 굉장히 정교하게, 그리고 아주 정성껏 만든 '구체관절인형' 같은 소설이다. 예쁘고 귀엽고 아름답고 서늘한, 여자아이 인형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다. 이토록 정성을 들인 묘사가 또 있을까 싶은 문장들이 가득하고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빼앗긴 작가가, 쓰는 글들마다 춤을 추는 것 같은 신명이 느껴진다.
상(像) : '아가씨'는 원작 '핑거스미스'의 딱 절반만 가져왔고 나머지는 두 여인의 성공적인 로맨스를 응원하고 축하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기에 개봉 전의 여러 가지 우려가 있었지만 이 모 두를 떨치고 그의 손에서 이토록 통쾌한 러브스토리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