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에 사는 또 다른 존재인 미생물을 밝혀내는 연구가 봇물 터지듯 활발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현미경으로나 겨우 보이는 작은 미생물들이 사람을 비만에 이르게도 하고, 면역작용을 좌우하며, 아기가 자라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잇달아 밝혀냈다.
내 안에 있는 이 작은 거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장내 미생물,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체에 사는 미생물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사람의 세포 수는 약 30조 개인데 인체 내의 미생물 개수는 약 100조 마리 이상이며, 무게는 약 2kg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람의 유전자 개수는 약 2만 2,000개로 알려졌는데, 인체 내의 모든 미생물 유전자 개수를 합하면 사람의 유전자보다 약 150배 많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미생물의 역할에 대한 관심은 미생물 연구의 대가인 제프리 고든 미국 워싱턴대 교수가 2006년 과학 저널 네이처에 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높아졌다.
고든 교수는 체내에 미생물이 살지 않는 '무균 쥐'에 뚱뚱한 쥐의 대변과 마른 쥐의 대변을 각각 주입하고 똑같은 먹이를 주면서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뚱뚱한 쥐의 대변을 주입한 쥐의 체중이 마른 쥐의 대변을 주입한 쥐의 두 배로 늘어났다.
당시 미생물 학자들 사이에서 이 연구의 파장은 컸다. 대변은 소화 작용의 결과로만 인식됐는데, 특정 증상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대변에는 인체 내의 미생물 중 99%인 장내 미생물이 함께 섞여 있다. 이 장내 미생물이 체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때부터 활발해졌다.
최근 네이처에 수록된 영국의 비영리 유전체학과 유전학 연구소인 '웰컴 트러스트 생어 연구소(Wellcome Trust Sanger Institute)'의 논문에 따르면, 인체 내장에 있는 세균 가운데 일부는 공기 중으로 이동해 비만이나 염증성 장 질환 등을 전염시킬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체 내장의 세균 중 3분의 1은 일종의 홀씨를 생성해 공기 중에 생존할 수 있고, 이 세균을 다른 사람이 흡입하면 장내 균의 균형을 무너뜨려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만 전염될 수도 있다"…英언론, 장내 박테리아 이동 연구 보도]
미생물, 왜 중요한가
체내 수많은 미생물에는 인체에 좋은 균도 있고 해로운 균도 있다. 이로운 균들은 몸에 침입한 병원균을 막아내고 음식을 소화하고 영양을 흡수하는 데 관여하며, 비타민을 만드는 효소를 생산한다.
외부 병원균과 싸우는 면역 반응에도 미생물이 관여한다. 2012년 美 하버드 의대 정하정 박사는 장내 세균을 모두 없앤 쥐들에게 한쪽은 사람의 장내 세균을, 다른 쪽엔 동료 쥐의 장내 세균을 각각 이식한 실험결과를 '셀(Cell)' 지에 발표했다. 같은 쥐의 장내 세균을 이식받은 생쥐는 멀쩡했지만, 사람의 장내 세균을 이식받은 생쥐는 면역세포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수는 장내 세균을 완전히 없앤 쥐와 비슷했다. 장내 세균이 건강해야 병원균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기가 자라는 데에도 미생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 베일러의대 연구진은 인간미생물군집프로젝트(HMP·Human Microbiome Project) 연구에서 여성이 아기를 가지면 질내 미생물의 종류가 급격하게 바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늘어난 미생물은 주로 우유를 소화하는 유산균이었다. 연구진은 아기가 엄마의 질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유산균을 몸에 받아들여 모유를 소화할 수 있게 된다고 추정했다. ▷제왕절개 아기에게 부족한 腸內 좋은 세균 '産道 분비물' 아기 몸에 문질러 보충한다
내 안의 미생물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질 수 있다. 앨버타대 연구진은 건강한 사람에게서 채취한 장내 세균을 환자에게 이식하면 환자의 83%에서 손상됐던 장내 세균이 회복됐다고 밝혔다. ▷기사 더보기
미생물에 따라 몸의 성질이 구분된다?
2011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혈액형이 A·B·O·AB형으로 나뉘듯이, 장내 미생물의 종류에 따라 몸의 성질이 3가지로 분류된다.
인간의 몸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종류마다 다른 효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하는 역할도 다르다고 한다. 박테로이데스, 프로보텔라, 루미노코쿠스 3가지 유형으로 세균 종류에서 이름을 따왔다. 장내 미생물 유형은 인종이나 국가에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고 식습관에 따라 차이가 미생물 분포에 영향이 크다.
박테로이데스 유형은 고기나 지방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사람의 장에서 많이 발견된다. 탄수화물 소화를 잘하며, 필요에 따라 모든 소화 효소를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비타민 B7을 만드는 효소도 많이 생산해 피부병이나 우울증을 예방한다.
채식 위주로 식사하는 사람의 장에서 많이 발견된다. 장에 있는 점액을 분해하는 성질인 '뮤신'과 비타민 B1을 풍부하게 만들어 각기병에 강하게 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유형으로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인 루미노코쿠스 유형은 식이섬유가 적은 고지방 식단을 먹는 사람의 장에서 많이 발견된다.
루미노코쿠스 미생물들이 우리 몸의 세포가 당분을 잘 흡수하도록 하기 때문에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박테로이데스 유형보다 장에 더 많은 당분이 흡수된다.
미생물이 만병통치약?
그렇다면 우울증이 있는 사람 또는 살이 잘 찌는 사람은 장내 미생물을 조절하거나 바꿔서 체질을 바꿀 수는 없는 걸까?
장내세균 이식만으로 위 수술의 20%에 해당하는 체중 감량이 가능하다는 동물실험 결과도 나왔다. 심지어 자폐증도 장내세균의 균형이 무너져 일어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의 대변에서 장내세균을 추출해 환자에게 이식하는 방법으로 살도 빼고 병도 치료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는 '대변 미생물 이식 수술'이라는 치료법을 시도, 건강한 사람의 대변 속 미생물을 분리해, 환자들에게 부족한 미생물을 이식해서 병을 고치는 시도가 성공하고 있다.
2013년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에는 대변 미생물 이식 수술로 치명적인 설사병을 고쳤다는 연구가 실렸다. 연구진은 환자 13명에게 항생제 치료만 하고, 16명에게는 건강한 사람의 장내 미생물을 이식한 뒤 경과를 지켜봤는데 16명 중 15명이 치료됐다고 한다. 항생제를 사용한 집단보다 미생물 이식의 치료 결과가 더 좋았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질병에도 대변 미생물 이식이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 환자에게 시술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무분별하게 시도 했다간
지난해 미 FDA는 임상 시험 결과가 나온 클로스트리듐균 감염증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술에 대해 임상 시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캐나다도 같은 방침이다. 앨름 교수는 "의료진이 임상 시험 신청서를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환자가 제때 혜택을 받기 어렵다"며 "특히 환자들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가정에서 직접 시술하는 예가 늘어나는 부작용도 생겼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대변 미생물 이식을 소개하는 글과 동영상이 넘쳐난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의 대변에서 추출한 용액을 관장 도구로 대장에 주입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무분별한 자가 이식은 되레 더 큰 병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대변 기증자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과거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걸린 것처럼 다른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또 주입 과정에서 대장에 상처가 나 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다. ▷기사 더보기
체내 미생물을 지켜야 하는 이유
현대인은 육식을 늘리면서 채식을 통한 섬유소 섭취가 줄었고 그로 인해 섬유소를 먹고 사는 장내 세균이 타격을 입었다. 파트너가 무너지자 인간도 바로 피해를 봤다. 과학자들은 암이나 당뇨, 비만이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 군집이 붕괴하고 해로운 장내 세균이 득세하면서 발생한다는 증거를 잇달아 찾아냈다. '사이언스'지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2013년 10대 과학 뉴스'의 하나로 꼽았다. 자폐증이나 우울증도 장내 세균의 균형이 무너져 일어난다는 주장도 나왔다.
과학자들은 장내 세균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라고 본다. 병에 걸린 사람일수록 유익한 장내 세균이 줄고 나쁜 균만 득세해 다양성이 줄어든다. 한번 나빠진 장내 세균은 회복하기 어렵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2016년 1월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식사 습관의 변화로 장내 세균이 바뀌면 그 영향이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며 나중에 식사 습관을 바꿔도 회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심각한 것은 한번 종의 다양성이 줄면 후대에 섬유소를 보충해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장내 세균을 한번 잃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기사 더보기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임기 내 마지막 대규모 과학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로 우리 몸속의 미생물을 선정했다.
▷오바마의 '미생물' 사랑...미생물 활용한 약은 '블루오션'
우리 몸속의 미생물 전체의 유전 정보 지도를 그리는 이 프로젝트에 2년간 1400억 원을 투자한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장내 미생물로 인간의 체질을 바꾸고 치료가 가능한 날들이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