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냐 '고립주의'냐.
올 미국 대선에서 외교 정책의 방향이 민주당과 공화당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1976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이후 미 대선에서 개입이냐 고립이냐를 놓고 외교정책 논쟁이 불거진 것은 40년 만이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확실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2일(현지 시각)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 구상을 내놓으면서 대외 문제에 필요한 개입을 하고, 글로벌 무대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확장하는 '국제주의'를 주장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가 기존 동맹 관계를 재검토하고, 대외 개입을 줄이겠다면서 내놓은 신(新)고립주의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정반대다.
미국은 1·2차 세계 대전 이전만 해도 유럽과 거리를 두는 고립주의가 득세했다. 그러나 파시즘 위협에 직면하자 적극적으로 국제 질서에 개입했다. 동서 냉전 당시에는 소련 봉쇄 정책을 택해 전후 세계 질서를 주도했고, 세계경찰 역을 자청했다. 하지만 경기 침체로 미국의 형편이 예전 같지 않으면서 고립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퓨리서치 조사에서 미국인의 57%가 '미국은 자국 문제에 더 신경 써야 하고, 다른 나라 문제는 해당국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답한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힐러리는 이날 연설에서 "동맹 강화가 오히려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은 동맹과 강력한 파트너십을 유지해야 한다"며 "트럼프식으로 한다면 미국은 점점 고립될 것이고, 이는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이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방위비 분담 논란에 대해서도 힐러리는 "많은 동맹이 (이미) 방위비 지출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기존 동맹의 틀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트럼프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힐러리는 미군 철수를 시사한 트럼프와 달리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을 유지하면서, 한·미, 미·일 동맹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핵무장 허용론'에 대해서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힐러리는 "트럼프가 일본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철회하고 일본이 핵무기를 갖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며 "트럼프는 일본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날 경우 '전쟁하라면 하라지. 행운을 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게 바로 핵전쟁을 의미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궁금하다"고 했다.
힐러리는 이 밖에도 무슬림 입국 금지, 미·멕시코 국경지대 장벽 건설 같은 트럼프의 외교·안보 구상을 "위험할 정도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며 "이상야릇한 떠벌림이나 개인적 적의, 명백한 거짓말로 미국을 이끌 수는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3일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지역 유세에서 힐러리의 공격에 대해 "애처롭다. 외교 연설을 한다고 해놓고 정치 연설만 했다"고 했다. 그는 "힐러리의 연설은 외교 정책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힐러리의 비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고립주의 논란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가세했다. 그는 2일 콜로라도주(州) 콜로라도스프링스의 미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미국은 지도자의 역할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고립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 고립주의는 세계화되고 상호 연결된 현재 세상에서는 가능하지도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바마는 "각종 분쟁 현장에서 빠지고 싶겠지만, 진주만 공습과 9·11 테러 같은 공격은 (미국을 둘러싼) 바다 그 자체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오바마는 "고립주의는 미국을 테러 위험에 더 노출시키고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명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거짓된 위안"이라고도 했다.
☞고립주의(isolationism)
자국의 이익이나 안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한 다른 나라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 기조. 1796년 '미국은 유럽의 분쟁에 휘말려선 안 된다'는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이임사에서 비롯돼 제임스 먼로 대통령 재임 당시인 1823년에 나온 '먼로 독트린'으로 공식화됐다. 미국은 산업화와 영토 확장을 달성하고 국력이 크게 강화된 20세기부터는 국제 문제에 적극 개입해 주도권을 발휘해야 한다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로 전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