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오지은(35)은 2014년 2월 짐을 싸서 일본 교토로 떠났다. 40일가량의 여행에 동행은 없었다. 이 여행의 결과물은 노래로 남지 않았다. 대신 작년 말 한 권의 에세이집으로 나왔다. '익숙한 새벽 세시'. 그의 대표곡과 같은 제목이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오지은은 마니아들을 거느렸지만 팬 층은 넓지 않다. 그러나 책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SNS와 소문을 타고 넉 달 만에 1만4000부가량 판매됐다. 출판사에선 표지를 바꾼 특별판까지 찍어냈다.
지난 9일 서울 서교동에서 오지은을 만났다. '홍대 마녀'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잘 웃고 수다스러웠다. 책의 주제는 '30대의 방황'. "예전에는 20대의 어리석음을 동력으로 창작을 했죠. 2013년 3집 작업을 할 때엔 그 동력마저 끊겼다고 느꼈어요. 누구나 막연히 '나이가 들면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싶으니 쇼크를 받았어요."
잠시 지나가는 우울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증세는 심각했다.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됐다. 영화도 책도 볼 수 없게 됐다. 마침내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됐다. 의사는 번아웃 신드롬(탈진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의사는 "새로운 걸 만들지 않아야 병이 낫는다"고 말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했다. 조용하고 쓸쓸한 곳에서 옛것이 보고 싶었다.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행을 떠났다. 고도(古都) 교토에서 그는 끊임없이 '행복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를 고민했다. 일상의 소소한 행위를 통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평소엔 엄두도 못 내던 브랜드 세일 매장에서 외투를 두 벌이나 사 본다거나, 유명한 팬케이크 집을 찾아가 팬케이크를 먹어본다거나…. 사소한 나날의 사소한 감정에 대한 기록에 독자들이 열광했다. 오지은은 "비겁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 게 아닐까"라며 까르르 웃었다.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이야기의 반대라서가 아닐까요? '노력해도 별수 없으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조그맣게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해서."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00학번인 그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 활동을 했고 26세 때 1집 앨범을 내놓았더니 몽땅 팔렸다. '예술가'라는 자유직업인이지만 책을 관통하는 정서는 또래 회사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내 인생 어디로 가나'를 고민하며 통기타 튕기던 우리 윗세대가 '그걸 내가 해 보니 의미 없더라' 해서 지름길로 온 게 우리 세대다. 그런데 살아보니 겪어야 할 방황은 겪어야만 하더라"고 했다. "'내가 잘하고 있나'를 의심해야 정말 잘하는 단계로 갈 수 있는데 '잘하고 있으니 열심히 해'라는 말에 그 의심의 시간을 빼앗겼어요. 우리 세대의 그런 정서를 시간 많은 제가 책으로 쓰고 싶었어요."
오지은은 썼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우울은 노천 온천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가 차갑다 하는 고작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자기검열과도 같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암 걸린 사람 앞에서 '새끼손가락을 베였더니 너무 아파' 엄살을 부리게 될까 봐 두렵다"는 이야기다. 밝게 이야기하지만 그의 우울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약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이런 인터뷰도 못하겠죠. 책을 완성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우울증이라는 게 당연한 일을 못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도 남의 시선이 부담돼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는 쾌활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저는 누군가가 저를 좋아해 주기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이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런 병을 앓고 있다는 것도 밝힐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오지은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뇌(腦)는 음악 할 때와 달랐다. 곡을 쓸 땐 질질 새는 것 같은 감성이 도움이 됐는데 글 쓸 때는 흐리멍덩하면 안 되더라"고 했다. "익숙한 새벽 세 시에 잘 준비를 하는 인간이 '익숙한 새벽 세 시'라는 노래를 썼고, 그 시간에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는 인간이 책을 썼달까요."
그의 노래는 시작한다. "거리를 걷고 또 친구를 만나고 많이 웃는 하루를 보내도/ 오늘도 나는 잠 못 드는 이미 익숙한 새벽 세시". 책은 끝난다. "버티지 못한다고 비겁자는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