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이라고 하지만 낙랑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전한(前漢) 시기 낙랑군은 한나라의 군현으로 관할 지역은 물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제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서기 8년 중국에서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우자 낙랑에서도 23년 호족인 왕조(王調)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후한을 세운 광무제가 30년 군대를 파견하여 왕조를 죽이고 낙랑군을 다시 장악했다.

2세기 후반 중국이 혼란기에 들어가자 요동의 군벌인 공손씨가 낙랑을 장악했고, 낙랑군의 남쪽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했다.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중국 북부를 장악한 위(魏)나라가 공손씨를 토벌하여 낙랑·대방군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위나라와 서진(西晉)이 차례로 세워졌다 멸망하고 중국 북부가 혼란에 빠지자 낙랑 지역은 중국 왕조와의 연결이 다시 끊어지고 요동 군벌 장통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토착세력의 반발과 공격에 시달리던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낙랑'이란 이름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장통은 1000여 가(家)를 이끌고 요서의 선비족 수장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모용외는 대릉하 주변에 낙랑군을 다시 설치했다. 중국사에서는 이렇게 없어진 군의 유민으로 새로 만들어진 군을 '교군(僑郡)'이라고 한다.

요서의 낙랑군은 왕씨와 한씨 등 낙랑 유민들이 주도했고 전연·후연·북연 등 이 지역을 다스린 왕조들 아래서 상당한 위상을 유지했다. 439년 화북을 통일하여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을 끝낸 북위 태무제는 낙랑군을 난하 유역인 유주(幽州) 비여현으로 옮겼다. 그리고 525년 낙랑군은 다시 대릉하 유역의 영주(營州)에 낙량군(樂良郡)으로 이름을 바꾸어 옮겨졌다. 하지만 곧이어 이 지역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자 537년 남영주(현재 하북성 일대)로 다시 옮겨졌다. 이때 아주 작은 규모로 위축된 낙랑군은 이후 명목만 유지하다가 북제(北齊·550~577) 말기에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공동기획 : 한국고대사학회